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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 Dec 18. 2019

프리랜서와 호칭

안녕하세요. 저는 프리랜서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김혜민입니다.'


프리랜서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거예요? 광고쪽?


'아니요..  그냥... 그냥 글 쓰고 있어요.'


우와. 작가세요?


'아... 네...'


이리저리 말을 돌리려다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내 직업을 설명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이런저런 일을 했었다. 주로 번역과 관련된 일이었다. 꽤 큰돈을 받았을 때도 있었고, 일이 없어 쫄쫄 굶었을 때도 있었지만, 어찌 되었건 정당한 대가를 받고 지속적으로 일을 하고 있으니, 당당히 나프리랜서 번역가라고 소개하면 될 것을 나는 꽤 오랫동안 나를 소개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술자리에서 동창을 만났다. 중학 다닐 때는 인사도 하지 던 사이였는데, 안면이 있지 않냐며 친구가 데리고 나왔다. 'A도 같이 가도 돼?' 들뜬 친구의 목소리에서 직감이 왔다. 지금 얘네 썸 타고 있구나. '그래, 그냥 데리고 와.'


어릴 적 얼굴이 묻어있으면서도 이제는 제법 아저씨 티가 나는 그 친구와 쭈볏쭈볏 인사를 건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어김없이 무슨 일을 하냐는 질문이 오고 갔다. '번역해.'라는 나의 말에 '거미가 영어로 뭐냐.'는 엉뚱한 질문이 돌아왔다.


그건 왜 묻냐고 물어보니 테스트해본 거는 답이 돌아왔다. 어릴 때 공부도 그다지 잘하지 못한 내가 번역을 한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가 인문계 고등학교 나온 것도 처음 들었다고. 공부 못하는 이미지라는 말엔 헛웃음마저 나왔다. '나는 너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었는데 너는 나에게 관심이 많았었구나. 내 이미지도 자기 멋대로 만들고 말이.' 근데 더 슬픈 건 그 얘기엔 악의가 없다는 이다. 증거를 대보라는 농담지 건네 온 그 아이의 눈엔 악의가 없었다. 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 당시 난 내 이름으로 출간된 번역서 한 권이 있었고, 그걸 증거로 보여줬다. 굳이 증거까지 보여줄 필요가 없었는데.

그냥 무시하면 될 것을.



사실 예전 같으면 나는 나를 번역가로 소개하지 않았었다. 그저 이저런 일을 하고 있다고 말로 화제를 돌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을 출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나도 들떠있었다. 그래서 누군가에 처음 용기를 냈던 것. (하필! 용기를 내도 그런 xx!)


아르바이트 정도로만 생각하는 주변의 시선이 싫었고,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내 일에 대해 자신이 없었다. 일은 꾸준히 했지만, 수입의 불안정으로 인해 자리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스스로 위축되었을 때 내 이름의 번역서가 출간된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번역가가 되었다. 글 쓰는 사람이 아니라,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영한 번역가. 꼭 책을 출간해야 번역가가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느 모임에서 한 언니가 자신을 시민기자라고 소개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한참을 부러워했다. 그 언니는 다부지고 당당한 목소리였다.


 역시도 시민기자로 꽤 오 활동해왔지만, 나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지 못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고, 친해지고, 그게 하나의 인터뷰 기사가 되는 그 언니의 능력이 부러웠다. 저래야 시민기자고 말할 수 있는  아닐까? 방식이 다를 뿐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 여전히 쭈볏쭈볏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쓴 기사는 무엇일까? 나는 그저 원고료만 받으면 그만인 걸까? 프리랜서 직함 누가 주는 것일까?


친구 중 한 명은 sns에 매일 짧은 시를 쓰곤 는데,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보면 자신을 시인이라고 소개하곤 했다. 취업을 준비하는 취준생이면서! 이걸 허언증이라고 말해야 하나. 매일 시를 쓰고 있지만 시집을 낸 적이 없으니 시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걸까. 사실 모르겠다. 그저 그 당당함이 부러울 뿐이다.



한 잡지사 여행기를 기고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나를 뭐라고 설명해야 하 물었다.


'여행작가라고 적어두면 될까요?'


아니요..  저는 책을 출간한 적이 없어서..


'그럼 여행칼럼니스트라고 소개할게요.'


그 뒤로 그 잡지에선 나를 여행칼럼니스트 소개하고 있다. 마음에 든다. 나를 부르는 호칭이 하나 더 생다.


프리랜서가 된 후 가장 많이 들은 호칭은 선생님, 작가님, 번역사님 등등이다. 제일 우스운 건 쌤(선생님의 줄임말)이다. 나는 누군가를 가르친 적이 없는데 나에게 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우리나라에선 선생님, 사장님, 여사님, 이모, 삼촌이 참으로 많다.



우리 엄마는 개인택시를 운영한다.  일을 하게 된 건 6년 전부터였다. 대기업에 다니는 아버지 덕분에 우리 집은 그리 가난하지 않았다. 그러니 벌이가 나빠 시작한 일아니다. 그저 하고 싶은 일을 뒤늦게 시작한 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엔 프리랜서가 두 명이네.) 한 평생을 주부로 산 엄마. 그렇다 보니 사업자 법인 있는 사장님이 되었다는 건 엄마 스스로에게도 자부심이었나 보다. 어떤 이는 엄마를 사장님이라 부르고, 또 어떤 이는 엄마를 기사님이라고 부른다. 참 멋진 호칭이다. 이왕이면 사장님으로 불러주면 좋지만 기사님도 나쁘지 않다.


'혜민 엄마', 또는 우리 오빠 이름을 사용하여 '정현 엄마'. 이 외엔 딱히 호칭이 없던 엄마에게 호칭이 여러 개가 생겼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한동안은 꽤 자랑하고 다니셨다. (물론 기분 나쁜 호칭도 있다고 한다. 그 호칭은 바아줌마란다. 지금 나에게도 아줌마라고 부르면 기분이 나쁠 것 같다.


아줌마라..  나는 식당에서도 웬만하면 사용하지 않는 호칭이다. 식당에선 모두 다 나의 이모이자 삼촌이다. 더 친근하니깐! '이모님, 여기 사이다 한 병 추가요!')



회사에서는 직급이 있다. 나는 김주임으로 불렸다. 하지만 프리랜서는 직급이나 호칭이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불러주는 사람이 정하는 거다. 그리고 내가 정하는 거다. 인터넷에 웹소설을 끄적이는 친구는 당당히 자신을 웹 소설가라고 소개했다. 조회수도 높지 않고, 그의 소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렇게 자신을 소개하고 나니 스스로 정한 연재일엔 반드시 글을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책임감이 생긴 거다.



나도 이제 당당히 나를 소개해야겠다.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프리랜서 번역가이자 여행칼럼니스트, 그리고 시민기자이자 크리에이터 김혜민입니다. 아! 지금은 브런치 작가도 하고.. 주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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