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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 Dec 29. 2019

싫어도 좋아도 나는 나다.

자존감 회복 프로젝트


친구는 취미로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어디에든 올렸다. 글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평소에도 책을 많이 읽고, 그 책을 종종 나에게 소개해다. 그 이야기는 언제나 맛깔스러운 한정식 같았다. 풍성했고 내 입맛에 딱 맞았다.


그래서 친구가 브런치를 시작했으면 했다. 딱 맞는 좋은 플랫폼이라 생각했다. 런데 나에게 편한 마음을 툭 내밀었다.


"다 좋은데, 너보다 글을 잘 쓴다는 말은 좀 듣기 북해."


습관처럼 나는 "나보다 글을 잘 쓰는 네가.."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사용던 것이었다.

나보다라... 


보다 글을 잘 쓰 네가 부럽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나보다'라는 말이 거슬렸나 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건 나의 내면 심리를 반영하는 말이었다. 나는 왜 그런 희한한 말이 입에 붙은 걸까. 


솔직히 말하 나는 평범한 내가 싫다.

모든 게 어중간했다. 


그런데 이것이 나를 기준으로 삼고 있는건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건지는 모르겠다.


첫 째는 세상 불공평해 보이는 사람(모든 걸 다 가진 듯 보이는 사람)이 부러웠고, 둘 째 내가 가지고 싶은 무언가를 가 사람, 게다가 그걸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부러웠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고군분투하는데 그걸 활용하지 않는, 혹은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답답. 그래서 주변에 뭐든 권유했다. 그게 나로선 선한 마음이었지만,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었나 보다.


"태어나보니 집이 부자, 게다가 노력도 안 했는데 예뻐. 어릴 때 조기교육을 잘 받은 건지 아니면 진짜 머리가 좋은 건지 공부까지도 술술 잘해. 게다가 성격까지 둥글둥글 하니 이성뿐만 아니라 동성에게도 인기가 많아. 그러니 어릴 때부터 사랑을 독차지하지."


어릴 적 한 아이를 생각하며 쭉 나열 글인데

갑자기 내가 가진 것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사진이라는 도구로 일상의 행복한 단편만 보여주는 인스타그램을 시작하고, 그 마음이 더 커졌다.

내가 가진 것은 초라하고 남들 가진 것은  커 보이는 마음.



어느 날 s 언니 이야기를 나누다, 어쩌다 보니 속마음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인스타그램 보면 매일 여행 다니는 사람들 참 많아요. 삶의 방법은 다양하다는데, 그런 사람들은 어떤 복 타고난 걸. 짜 부러워요." 넌지시 던진 나의 말에, 언니는 코웃음 치며 되받아쳤다.


" 인스타그램에 온통 여행 사진. 다른 사람 너를 부러워고 있을 거야."


이건 여행에 한정된 말은 아니다. 어떨 때 집을 잘 꾸며놓은 금손 주부가 부럽고, 또 어떨 때 글을 맛깔스럽게 잘 쓰는 인기 작가가 부럽고, 또 어떨 땐 갓 시작한 유튜버가 1년간 열심히 한 나보다 구독자가 몇 만 배 더 많 때 부러움이 시샘으로 바뀌는 걸 느낀다. 물론 나보다 부자인 사람도 부럽다.


하지만 나보다 더 많은 걸 가진 사람은 세상에 차고 넘친다. 굳이 비교하자면 입이 아플 정도다.

이 말의 기준이 나인 것처럼 보이지만, 국 내가 아니다.


나는 나를 돌보고, 나에게 관심을 두고, 나의 반짝이는 무언가를 키우기보다는 다른 이에게 더 많은 관심을 두고, 다른 이의 반짝이는 무언가를 시샘했다.


그런데 그 사람과 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다. 다른 상황에 처해있고, 다른 고충을 품고 있다. 물론 나도 다른 사람보다 더 반짝이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더 잘하지 못하더라도 더 끈기가 있다던가, 더 끈기가 없다면 그거 말고 또 다른 걸 더 잘하던가.




"이 팔자 좋은 여자야. 니 팔자가 부러워."


7년 넘게 직장 생활을 이어온 친구는 꽤 연봉도 세고, 자기 집도 스스로 구매할 정도로 멋 아이였다. 그런데 프리랜서인 내가 자유로워 보여 부럽단다. "그래도 안정적인 게 최고야. 게다가 너는 연봉도 세잖아." 


생각해보면 우린 기준이 달랐다. 나는 연봉이었고, 친구는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친구는 아니라며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는다. "어찌 되었든 너는 하고 싶은 일을 하잖아. 그게 최고야."


그래, 그건 부정할 수 없다.



"사실 있잖아. 친구 중에 나는 네가 '제일' 부럽더라고."

또 다른 친구의 말이다. 나는 이 말이 꽤 충격이었고, 이유 모를 눈물이 났다. 나는 그 친구가 부러웠다. 아이 낳아서 잘 키우고, 늘 행복한 삶을 사는 듯 보였고, 무엇이든 늘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강인한 친구였다. 지금 나에겐 '아이'는 숙제고, 그 친구는 그 '숙제'를 푼 인생 선배다.


물론 앞으로 더 많은 숙제가 남아있고, 아이 키우느라 자기 삶이 조금 사라졌을지 몰라도 아이들이 조금만 크면 분명 그 친구는 다른 일을 훌륭히 해낼  있는 자존감이 꽉 찬 친. 늘 자신감이 넘치는 친구였기에 부러웠는데, 그 친구가 나를 부러워하다니. 


나는 나의 반짝이는 면을 보지 못하고 살고 있었구나.



늘 당찬 모습만 보여주려 애쓰고, 거기서 얻은 칭찬으로 자존감을 찾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나는 자존감을 찾지 못고, 칭찬받고 싶어 더욱더 안달 난 어린아이 되었다.


그래, 친구의 말이 맞다. 그걸 깨닫게 해 준 친구에게 고맙다.


우린 그렇게 구분 지을 필요가 없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싫든 좋든 그건 불멸 사실이다.




한 체급에 한 명만 올림픽을 나갈 수 있는 경기가 있다. 나는 미친 듯 노력했지만 타고난 게 없었다. 그래도 미친 듯 노력해 2등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타고난 1등이 있다. 그 1등이 한 세기에 나올까 말까 한 인재라고 기사에서 극찬을 한다.


한 세기에 나올까 말까 한 놈이 하필 나와 같은 시대에 태어나 1등 자리를 우두커니 지키니 나는 화가 난다. 그런데  내 삶은 그런 경기가 아니다. 그렇게 삶의 기준을, 방향을, 가치를 순위로 나열할 수 있는 경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좌절할 일만은 아니다. 어찌 되었든 2등까지 올라간 것도 대단한 일이고, 또한 2등에게도 길은 열려있다. 진짜 더더 열심히 해서 어느 순간 1등을 따라잡을 수도 있는 거고, 혹은 영원히 따라잡지 못한다면, 그 경기와 관련된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는 거다. 거기서 그 1등보다 더 앞서 갈 수 있 있다. 다른 거지 틀린 건 아니다.


이젠  나보다 더 가진 네가 부럽지 않다. 진심으로 응원을 해줄 수 있을 거 같다. 이젠 그런 마음이 생겼다. 물론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는 것도 중요하고, 칭찬받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나 자신을 스스로 인정하고, 스스로 칭찬해주는 것이 더 중요하는 것을 깨달았다.


"잘 해내고 있어. 혜민아."



아, 모르겠다.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써 내려갔다. 내가 늘 이런 생각하며 사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나도 피곤해서 살 수 없다. 그냥 써 내려가다 보니 나도 몰랐던 깊은 내면이 나온 느낌이다.


나는 나보다 더 가진 누군가가 더 이상 부럽지 않다. 또 어느 순간 무너질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기 위해 꾸준히 나를 돌 것이다.


다른 사람보다 나에게 더 관심을 가질 것이다.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겠다는 말은 아니다. 다른 사람을 돌보지 않겠다는 말도 아니다. 그저 나의 뿌리를, 나의 땅을 더 단단하게 다지겠다는 뜻이다.





그거 알아요?

당신 인생의 주인공은 당신이에요.

다른 누군가를 주인공 자리에 두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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