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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 Jan 19. 2020

프리랜서와 증명서

"대포 통장 때문에... 요즘 계좌 개설하는 게 더 어려워졌어요."


부산에서 회사를 다닐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던 은행인데 포항 친정집으로 오니 주거래 은행을 바꿔야 했다. 하지만 프리랜서, 그러니깐 반백수 은행계좌 하나 만드는 게 이렇게 어렵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죠?"

"프리랜서를 증명할 수 있는 서류가 필요해요."


사업자 법인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요구조건도 맞지 않아 내가 증명할 수 있는 건 프리랜서 증명서인데 그걸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역회사와 주고받았던 계약서? 그거면 될까? 아! 얼마 전 받은 번역서 출판 계약서가 있는데 그걸 제출해볼까? 


그 뒤 몇 번의 거절 끝에 겨우 겨우 은행 계좌 하나를 만들었다. 나를 증명하기, 그러니깐 은행 계좌 하나 만들기 이렇게 구차하다.


대출이 필요했다면 더 막막했을 것이다. 행인 건 그 뒤론 뭐, 또 다른 계좌를 개설하거나 대출이 필요하거나 하는 그런 상황은 없었다.




잡지사에서 나의 프로필을 요구했을 때, 프리랜서가 된 후 처음 은행 계좌를 개설했던 그날이 떠올랐다. 프리랜서로 5년간 보내면서 가장 잘한 일은, 번역서 한 권을 출간한 일이다. 그때는 그게 이렇게 쓰일 줄 몰랐.


프로필에 힘을 실어준 한 줄.


올해 새로 선발된 여행작가 10명의 프로필이, 나의 프로필과 함께 소개되었다. 내가 보낸 프로필에서 순서가 바뀌었다. 그건 뭐, 편집장님이 미리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수정한 부분니 상관은 없.


그러니깐... 나는 공모전 수상 경력 43회를 더 강조하고 싶었다. 내가 얼마나 공들이고 노력한 일인가! 런데 편집장님은 출판 경력을 맨 앞줄에 놓는 걸 원했다.


남자들이 소개팅 주선받을 때 가장 먼저 물어보는 것이 "그래서 걔 예뻐?"라고 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혹은 내가 몸 담고 있는 이 세계가 무엇을 가장 먼저 보는지 알 수 있는 질문이다.


"그러니깐 출판 경력이 있나요?"



나를 제외한 9명의 여행작가 프로필을 차근차근 읽어보니... 정말 화려하다. 출판을 어찌나 많이 했던지.


책 읽는 사람은 줄었다는데 왜 이렇게 출판한 사람은 많은지. 그런 분들과 함께 한다는 자부심을 가장 먼저 느껴야 하는데, 어깨를 나란히 하기엔 내 어깨가 한없이 초라해지는 마음이 더 컸다.


프리랜서가 된 후, 나도 내 이름이 찍힌 책 한 권을 가지고 싶었다. 사람들이 이유를 물어보면 "그냥."이라고만 답했다. 뭐,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서? 내 얘기를 공유하고 싶어서? 물론 그것도 맞다. 그런데 나에게 책 출간은...


누군가를 좋아할 때 이유 없이 그냥 좋은 것처럼, 그냥 좋아서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 그냥. 인세 그런 거 상관없이 해보고 싶은 일. 그래서 독립 출판도 해보고, 공동 출판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금은 이유가 바뀌었다. 여전히 '그냥 좋아서'도 있지만, '나를 증명하는 하나의 수단이 필요해서'라는 현실도 추가되었다.



출판 작가들이 출판 인세보다는 그로 인해 얻는 부가 수입, 그러니깐 강연이나 칼럼 등과 같은 활동으로 수입을 얻는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돈은 크게 되지 않지만 주기적으로 출판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물론 돈보다는 열정으로 책을 쓰고 만들고 세상에 내놓는다는 걸 강조하기 위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인세가 작다는 걸 강조하기 위한 말. 하지만 프리랜서 증명서, 그러니깐 나를 증명하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만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뮤지션은 끊임없이 앨범을 내고, 화가는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고, 작가는 끊임없이 글을 쓴다. 사진가는 끊임없이 사진을 찍고, 회사원도 끊임없이 자기 자리에서 일을 한다.


거기에 나의 열정과 애정이 없다면, 더 나아지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나의 고뇌가 없다면, 그리고 더불어 다른 사람의 칭찬과 인정이 없다면, 그들의 피드백이 없다면, 그렇다면 그 일이 기계와 다를게 뭐가 있겠는가.


그래서 나를 증명하는 프리랜서 증명서를, (그러니깐 눈으로 볼 수 있는 나의 이력, 직장인이라면 경력과 성과) 꾸준히 쌓아 올리는 것이다.





여행작가들의 프로필을 보고..  나는 또 그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그것밖에 안되나?"가 아니라 나도 그들처럼 꾸준히 노력해야겠다는 생각. 실력이 부족하면 두 배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


꾸준히 쌓아 올려야겠다.

프리랜서 증명서를.


오늘도

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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