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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 Feb 02. 2020

그 아이와의 첫 만남, 그리고 서서히 물들어가다.

시댁에 사는 강아지, 그리고 나의 트라우마


첫 만남은 요란했다.

단 한 번도 강아지를 키워본 적이 없는 나에겐,

반갑다 꼬리 흔들며 다가오는 것이

귀엽기보다는 거부감이 들었다.


어릴 적 트라우마 때문이다.


어느 시골 마을, 게다가

주변은 논밭밖에 없는 외딴곳에

오리 고기이 있었다.


주변은 공허한데 식당 안에는 사람들로 바글바글.

그곳 어린 내가 봐도 작은, 마당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는 멍하니 마당에 풀어놓은 강아지를 보다.


멀뚱멀뚱. 친해지고 싶은데

친해질 방법을 몰라 멀뚱멀뚱...

용기 내어 한 발짝...


그러니 강아지가 나에게 성큼 다가왔고

순간 움찔해 도망을 쳤다.



왜 도망쳤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당에는 나뿐이었고, 순간 겁이 났던 건데

뒤를 아보니 강아지가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마당 너머 커다란 문을 지나,

겨울이라 허허벌판이 된 논인지 밭이었는지 모를 흙길을 뛰었다.


옆구리가 아파올 때쯤 다리를 물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살이 아니라 바짓가랑이였다.


나는 그걸 또 뿌리치고 다시 마당으로 냅 뛰었다.

뒷얘기는 기억이 나지 않만,  순간의 기억이 (마당에서 뛰쳐나가 허허벌판을 뛰고 있고...

뒤에는 마치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따라오던 강아지의 모습이) 두고두고 악몽으로 남았다.


주인은, 그 강아지가 나랑 놀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

버무렸다.


기억은 왜곡되고 과장된다.

그러니 정확한 기억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겐 꽤 충격이었다는 건 사실이다.

아직까지도 순간 겁이 나는 걸 보면.



그러니 아름이의 들이댐에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밀어낼 순 없었다.


남자 친구 집에 정식으로 인사드리러 간 자리였기 때문. 친구 이름과 똑같은, 어찌 보면 사람 이름 같은..! 아름이.


아름이는 갈색 털푸들이다.

그게 첫 만남이었고, 두 번째인가 세 번째 만남에 

하도 달려들어 내 스타킹을 펑크 냈고,

그 이후엔 새로 산 잠옷 바지까지도 뜯어놓았다.


이놈 만나만 하면 내 옷에 털이 가득고,

가만히 있지 못하고 늘 나를 귀찮게 했다. 유난히도 활발한, 어찌 보면 정서가 불안한 아이였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고, 다소 애정결핍 증상이

보이는 아이.


쉼 없이 만져줘야 했다. 손짓을 멈추는 순간 또 손과 발로 나를 할퀴기 일쑤였다. 갈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았다. 


오빠 말로는 나를 자기 밑으로 보는 거 같으니 싫으면 단호히 거절하라고 하지만,

난 그 들이댐을 거부할 수 없었다.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점점 길들여지는 것 같 느낌.


모두가 잠든 밤, 화장실을 가기 위해 방문을 열면 언제 왔는지 내 뒤를 졸졸 쫓아와 귀찮게 던 아이.


어떨 땐 눈치도 없이 치근덕대더니

또 조금만 싫은 티를 내면 금세 풀이 죽 아이였다.



집으로 갈 시간이 와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면

어떻게 알았는지 서운함을 들어내며

말똥말똥 나를 쳐다보는 게 꼭 사람 같은 아이였다. 그러면서 또 가지 말라고 바짓가랑이를 잡아.... 바지를 엉망으로 만들어 나를 속상하게 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엉망 된 바지가 더 속상했다..!)


그렇게 나는 익숙해져 갔다.

문을 열면, 꼬리 흔들며 미친 듯이 달려는 아름이에게 익숙해져 갔다.

(정말 아름이는 '미친 듯이'라는 단어를, 미친 듯이 잘 표현하는 강아지다.)


 나이가 들어 자꾸 기력이 약해지는 모습을 보니 짠한 마음까지 드는 거 어느새 물들어간 게 분명하다. 


집으로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고 아름이를 무릎에 앉혀놓은 다음 털을 쓰담 쓰담하고 있는 나를 보면 내가 길들여진 것도 분명하다.


자꾸 물어뜯는 것을 대비해 편한 옷,

익숙한 옷을 챙겨 입는 것도 내가 터득한 하나의 방법이다.


-

그 덕분에 나는..

서서히 트라우마를 극복해가고 는 중이다.

아니... 사실 트라우마였다는 사실도 잊고 있는 중이다.




(예전에도 강아지는 귀여워했지만, 조금만 다가오려고 해도 거부감이 들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아무렇지 않더라구요...


왜 아무렇지 않을까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아름이 때문... 아니지..! 아름이 덕분인 거 같아요. 가끔은 이렇게 트라우마 대상을 마주하고 서서히 극복해가는 것도 하나의 답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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