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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단풍 Aug 07. 2023

내 아이가 미워질 수 있을까?



아이가 이유식을 먹기 시작하면서 식사 시간이 조금 더 길어졌습니다. 준비 시간도 그렇고요. 영양소도 고루고루 먹여야하고, 재료의 신선도도 신경써야 하고, 한 번에 많이 만들어서 얼려 보관하되 언제 만들었는지 날짜도 꼼꼼히 기억해야 하고요. 그래도 분유를 먹을 때보다 훨씬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아이 덕분에 그런 모든 수고가 그리 어렵지 않게 느껴집니다. 단지, 슬슬 아이에게 바라는 점이 생긴다는 것이 다를 뿐이죠.


“자자, 가만히, 옳지. 아니아니, 손으로 잡으면 안 되고!”


속싸개에 팔다리를 감싸고 꼼짝 못하던 아이는 온데간데 없고 이제 있는 힘껏 팔다리를 휘두르는 아이가 눈 앞에 앉아있습니다. 얌전히 입만 벌려주면 얼마나 고마울까, 하지만 어림없지. 고작 몇 주 사이 몸이 더 커진 그녀는 숟가락을 잡았다가, 그릇을 잡았다가, 뜨거운 이유식에 손을 담갔다가 놀라서 울지를 않나, 도무지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그 덕분에 그렇게 열심히 만들었던 음식은 얼굴과 목과 옷은 물론이고 식탁과 바닥까지 사방에 튀기 일쑤고요.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이를 낳기 전 제가 가졌던 두려움 중 하나였다는 것을요. 바로 내가 원하는 대로 아이가 자라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또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면서, 자신의 이득은 실용적으로 챙기면서도 다른 이들과 소중한 것을 나눌 줄 아는 사람. 사회에서 특별하고 특출한 사람이 되지는 않더라도, 그저 손해도 보지 않고 남에게 해도 끼치지 않는 평범한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서 자신만의 소소한 행복을 찾을 줄 아는 사람. 저는 아이가 그렇게 자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그녀가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하고 있던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예의도 없고 사람들에게 미움 받으면서 제 앞가림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면 어떡하지? 그럼에도 나는 내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혹시나 내 마음대로 자라지 않아서 그 아이를 조금이라도 미워하는 마음이 내게 생긴다면? 그런 마음이 드는 순간 나는 나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다못해 아이에게 쏟아붓는 사랑이 아깝다고 느껴지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면 내가 아주 나쁜 사람이지 않을까, 걱정은 늘 그렇듯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이유식을 다 먹고 그릇을 잇몸으로 열심히 씹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다시 또 정신을 차리곤 합니다. 입가는 물론이고 온 얼굴에 이유식의 파편을 묻힌 채 나를 보면서 활짝 웃는 아이를 보다가, 그녀가 신나서 팔을 흔들다가 떨어뜨린 그릇을 재빨리 받으면서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밥을 먹지는 않아도 이렇게나 잘 먹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고요.


내가 내 아이를 사랑하는 건 아이가 내가 원하는 대로 잘 자라서, 내 말을 잘 들어서가 아닙니다. 내가 인생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뜨겁게 사랑하는 순간에 태어난 아이니까. 그 오랜 시간 마음 졸이고 걱정하면서 기도했던 그 존재니까 사랑하는 거죠. 이 아이가 어떤 모습이든, 앞으로 어떤 가능성을 품고 있든,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우리는 이 아이를 사랑할 겁니다.


그래서 오늘도 마주 웃으면서 얼굴을 닦아줍니다. 손도 닦고, 얼굴도 닦고, 닦느라 젖은 옷을 갈아입히고 기저귀도 갈아입히면서요. 그리고 또 같은 고민을 반복하죠. 제발 가만히 좀 있어라, 단추 하나만 더 채우면 되니까, 좀! 왜 아이는 말을 듣지 않을까? 그냥 옷 입을 때만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건데, 일 분도 안 걸리는 건데, 하면서요. 괜찮습니다. 또 아이가 제 품에서 웃고 있으면 저는 또 다시 깨달을테니까요. 나는 네가 어떤 모습이든 사랑할 테야. 왜냐하면, 넌 나와 내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만든 아이니까.


그러고보면 또 다른 맥락의 이야기지만 사랑하니까 떠나보낸다는 말이 있죠. 그 말을 조금 비틀어서 이해해보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니까 놓아줄 줄 알아야 한다고요. 당연히 이 아이가 바람직한 결정을 내리도록 가르치고 도와주겠지만 결국에는 이 아이가 날개를 피고 스스로 날고 싶은 곳으로 날아가도록, 혹은 날개를 접더라도 튼튼한 두 다리로 세상을 담대히 걸어나갈 수 있도록 놓아줄 준비를 항상 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결국 내가 아이에게 원하는 건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 내가 원하는 선택지를 고르게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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