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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단풍 Oct 02. 2023

나보다 나은 존재

명절이 고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 것은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요.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겠습니다만, 명절의 피곤함이 여러 매체를 통해 강조되는 것은 우리나라가 조금 더 특별한 것 같습니다. 명절에 어떤 가족이 어떻게 특별하게 보내는지를 보여주던 미디어가, 요즘에는 명절에 벌어지는 가족간의 다툼과 갈등을 어떻게 피하고 어떻게 상대에게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열심히 쏟아내고 있으니까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명절은 가족과 친척들이 한 번에 모일 수 있는 귀한 시간임은 분명합니다. 이번에 저희 부부는 그래서 조금 더 특별한 명절을 보냈습니다. 각자의 가정을 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양가의 가족들을 한 자리에 모아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방식으로요. 그걸 가능하게 해준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바로 저희의 아이였습니다. 양가의 첫 번째 손녀였거든요.


두 가족의 어르신들과 형제들 사이에 여러 덕담과 이야기가 오고갔지만 이러나저러나 가족들의 웃음꽃이 피어났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이가 기어가기만해도 많이 컸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고, 뭔가를 잡고 일어날라치면 걱정과 놀라움이 섞인 탄성이 터져나왔고요. 울음을 터뜨리면 그건 그것대로 귀엽다며 다들 킥킥대고, 어쩌다가 씩 웃기라도 하면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녹아내리듯이 흘러나왔습니다. 양가의 가족들이 번갈아가면서 아이를 안아보고, 놀아주기도 하고, 그리고 그 사이에 저희 부부는 숨도 돌리고 쪽잠도 자고, 그렇게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또 하나 좋았던 점은 상견례와 결혼식 이후로 만날 일이 없었던 양가의 부모님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제 양가의 형제들도 결혼을 하게 되면 각자의 친정 혹은 시댁을 챙기기 위해 바쁠테고, 그러다보면 이렇게 우리 부부 기준의 사돈끼리 만날 일이 더욱 없어지겠죠. 그래서 이렇게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았던지요. 물론 대화 주제의 절반은 저희 아이에 대한 것이긴 했지만, 그 덕에 또 편하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참 행복했습니다.


“너무 행복하지. 그러니까 건강 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차에 짐을 싣는 걸 도와주러 오신 아버지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덕에 저는 문득 결혼 전에 제가 저희 부모님에게 어떤 자식이었는지 돌이켜보게 됐습니다. 이렇게나 웃게 해드린 적이 있었나, 아버지가 웃다가 눈물을 찔끔 짜내실 정도로 행복하게 해드린 적이 있었나, 그런 것들을요. 그리고 생각보다 그런 일들이 바로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사춘기라는 이유로, 대학에 가서는 이제 조금만 놀고 싶다는 이유로, 군대는 군대 그 자체를 이유로, 취업 준비를 할 때는 스터디와 시험 준비를 이유로, 취업 후에는 회사를 다닌다는 이유로, 퇴사 후에는 또 퇴사했다는 이유로, 재취업을 하고 결혼을 할 때에는 또.... 저에게 주어진 각각의 시기마다 이런저런 핑계들로 가족들과 온전한 시간을 같이 보내지 못한 것 같아서, 한겹 한겹 기억을 들춰볼 때마다 한층 한층 마음이 더 무거워졌습니다.


육아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두려움으로 마음이 무거워졌었습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해주셨던만큼 내 아이에게 해줄 수 있을까, 그런 자신이 생기지 않아서 그랬죠. 그리고 아이를 키우며 부모님이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보니 이제는 죄송함으로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그간 나같은 아이를 키우며 얼마나 힘드셨을까, 나는 왜, 내가 조금이라도 어리고 부모님께서 한 살이라도 젊었을 그 귀한 시절을 그렇게 허투루 보냈을까. 그런 생각에 점점 더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놀랍지. 너무 신기하고, 시간이 너무 빠르다.”


아버지는 또 그런 말씀을 하시며 제 어깨를 툭툭 두드립니다. 그저 손녀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인생 가장 큰 행복을 누리고 계시다며, 제가 지금까지 지워드린 무게를 제 아이가 다 덜어드린 것 같은 모습으로 걸어가십니다. 아, 아직도 정답을 모르겠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분명히 알 것 같습니다. 적어도 부모님을 웃게한다는 면에서, 이미 제 아이는 저보다 훨씬 더 나은 존재라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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