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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단풍 Jul 19. 2023

이사


어느덧 밤 열 한시, 평소와는 다르게 저는 혼자 소파에 앉았습니다.


내가 연애를 할 수 있을까 걱정만 하던 사람이 어느새 결혼을 하고, 사람 구실은 해낼 수 있을까 고민만 많던 사람이 어느새 한 아이의 아빠가 됐습니다. 놀랍고, 감회가 새롭고, 세상의 그 어떤 표현으로도 믿기지 않는 기적인 것 같은데 왜 지금까지 이런 감사함을 느끼지 못했는지 의문입니다. 그런 걸 보면 결혼도 아빠가 된다는 것도 잠시나마 뒤를 돌아보며 감회를 느끼기에는 분명 바쁘고 고된 일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아빠까지 된 사람이 왜 밤 열 한시에 혼자냐고 묻는다면, 내일이면 이사를 하게 되어서 그렇습니다. 순차적으로 몸을 담았던 두 곳의 직장에서 꾸준하게 모아온 돈에 대출까지 받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힘을 합쳐 겨우겨우 구했던 지금의 집을 떠나 새로운 집으로 가게 되었거든요. 세상에, 벌써 몇 년이나 흘렀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습니다.


시장에서 도배도 알아보고, 인터넷에서 저렴한 조립형 가구도 알아보고, 서로 아끼는 물건들을 어떻게 예쁘게 보관할지 고민하면서 아옹다옹 살아가기를 절반. 그 모든 물건을 뒤로 밀어둔 채 아이를 위한 물건과 공간을 준비하며 살아가기를 또 절반. 창 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에 서로의 손을 잡고 낮잠을 자기를 절반, 아이의 울음 소리에 새벽에 억지로 눈을 떠서 번갈아 일어나기를 절반.


신기합니다. 이사 준비를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전화를 걸면서 짜증이 났던 것도 잠시, 아직 그래도 깔끔한 하얀 벽지 구석구석을 살피다보니 건조했던 마음도 아침 이슬을 맞은 숲처럼 촉촉하게 젖어가는 기분입니다. 아무쪼록 다음에 오는 분도 이 집에서 행복한 기억을 쌓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러고보면, 전혀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축복을 빌어주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는 요즘입니다. 아니, 얼굴을 알든 모르든 그저 사랑과 호의를 베풀기가 힘들어지는 것이 요즘인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아는 사람을 향한 사랑이 너무 강렬해서 다른 사람을 더 미워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때로는 잘 모르는 이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푼다고들 합니다. 그러다가 다른 소식이 들려오면 손가락질의 방향이 반대로 바뀌기도 하고, 똑같은 두 사람 사이에서 수없이 반복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실이 오해로 밝혀지면 그로 인해 상처입은 사람을 보듬어주기보다, 그 오해를 사실로 주장했던 사람에게 돌팔매질을 하면서 정의가 이뤄졌다며 만족하기도 하고요. 때로는, 소중한 내 아이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거리낌없이 다른 아이에게 소리를 질러대기도 합니다. 그것이 아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일 때가 더 많기도 하지만요. 내가 소중한만큼 남도 소중하고, 내가 지키려는 소중함을 다른 사람도 가지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런데 왜 그럴까요.


아무튼 이런 세상이다보니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좋은 미래를 빌어주고, 다시 보지 못할 사람에게도 행운을 빌어주는 것이 참 어려워졌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혼자 기도해봅니다. 다음에 오시는 분도 우리가 이 집에서 얻은 것보다 더 많은 행복을 누리시길. 이런 기도를 한다고 들어주는 사람도,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설령 누군가 듣는다 해도 이런 이유로 바보같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기도해봅니다. 내가 이렇게 기도하는 것처럼 누군가 이런 기도를 하길, 그런 기도가 많아지고 많아져서 서로 이어지고, 사랑이 전해지길. 우리만큼 다른 사람도 행복하길, 그리고 그렇게 살다보면 우리 가족도 더 큰 행복을 누릴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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