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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단풍 May 30. 2024

이사진 간담회

A씨 이야기

이사진 간담회는 직책과 상관없이 모든 직원을 긴장하게 만드는 행사였다. 그 때문인지, 항상 점심시간을 빌려서 진행했던 보통의 간담회와는 달리 퇴근 시간 한 시간 전인 다섯 시에 사내 강당에서 진행됐다. A씨는 처음 보는 직원들 사이에 섞여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종종 그의 입사 동기들이 여기저기서 보였고 인사를 건네오는 사람도 있었지만, 예전처럼 함께 모여 앉지는 않았다.     


“얼른 시작하고 얼른 끝냅시다. 다들 일찍 퇴근하고 싶잖아요?”     


새로 취임한 전무이사라는 사람은 마이크를 잡고 그렇게 얘기했다. 단상 위에 푹신한 의자를 두고 다른 이사들과 함께 앉은 그는,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무슨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고 제가 시간을 낸 건 아닙니다. 다만 저도 직원부터 시작해서 이 자리까지 오게 됐고, 여러분들에게도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많이 해줄 수 있을 것 같아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제가 직원일 때 겪었던 어려움과, 지금의 여러분이 당면한 어려움이 다르잖아요? 그런 것들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앞으로 발을 잘 맞춰나가자, 그런 취지로 마련한 자리입니다.”    

 

새로운 전무이사는 마치 박수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잠시 마이크를 내려놓고 직원들을 둘러봤다. 하지만 다들 멍한 눈으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헛기침하며 목을 한 번 가다듬고는 다시 마이크를 들어 올렸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요즘 회사의 상황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습니다. 높은 연봉을 기대하고 들어오셨다가 실망한 분도 많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매출도 생각만큼 늘어나지 않았고, 퇴사율은 전보다 높아지고. 직원 여러분께나, 저희 회사에게나 쉽지 않은 시기입니다.”     


그것 때문이었군. A씨는 생각했다. 과장 아래 직급들을 모았다는 건 그 직급들의 퇴사율이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A씨의 동기들 중에도 사내 메신저에서 소리 없이 사라진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 그런 숫자들이 많아지니 회사의 경영진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러분들 다 아시는 윈스턴 처칠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낙관주의자는 위기 속에서 기회를 보고, 비관주의자는 기회 속에서 위기를 본다고. 여러분, 위기는 위기입니다. 하지만 그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건 철저히 우리가 하기 나름이죠. 우리 직원 여러분께서도 이런 의식을 가지고 회사와 함께 싸워나가길 당부드립니다. 그렇게 함께 이 위기를 이겨나가면 당연히 여러분께서 바라마지않는 그런 좋은 대가와 보상들이 주어질 것입니다.”     


새로운 이사는 말이 많았다. 얼른 시작하고 끝내자는 첫 말과는 다르게 그의 말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포기한 듯 고개를 떨구거나 다른 곳을 쳐다보며 시간이 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마치 이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일부 직원분들은 회사의 방침에 부당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어요. 그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숨길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기특하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회사에 애정이 있어야 자기가 보기에 틀린 것도 보이고, 고치고 싶은 마음도 드는 겁니다. 다만, 지금은 시기상조다. 이렇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직원 여러분이 보기에 부당한 것도, 나중에 경력이 쌓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뜨게 되면 다르게 보일 겁니다. 그러니 힘들어도 참고 견뎌서, 연차를 쌓고 높은 직급에 오르시게 되면 행동하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잘 참으셨다가 나중에 저희 자리에 오셔서 바꾸시면 되는 겁니다.”     


그때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가녀린 하얀 팔이 위로 솟구쳐 올라온 것은. 위로 세워진 팔은 하얗고 가늘었지만, 워낙 다들 처진 자세로 앉아있다 보니 금방 눈에 띄었다. 대체 이사의 말을 가로막고 팔을 든 것이 누구인지, A씨를 비롯한 직원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쳐다봤다.     


“아아,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좋아요, 이렇게 소통하려는 자세가 아주 좋아요. 다들 먼저 박수 한 번 쳐줍시다.”     


새로운 전무이사는 그렇게 사람들의 호응을 유도했다. 그 사이, 단상 위에서 혼자 쭈뼛거리며 서 있던 정장 차림의 진행자가 자신의 마이크를 들고 손을 든 사람에게 후다닥 뛰어갔다. 마이크를 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바로 얼마 전 노동조합 실행 위원에서 탈퇴한다던 A씨의 동기였다.     


“이사님 말씀은 감사히 잘 들었습니다. 다만, 부당함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권위와 힘은 현재 이사님 세대에 있는데, 왜 그걸 저희 세대에게 전가하시는 거죠? 지금 불합리한 것은 지금 바꿀 수 있는 분이 바꿔주셔야지, 저희는 참고 기다리는 만큼 손해가 더 커지는 것인데 어떻게 마냥 참고만 있을 수 있겠어요?”     


당돌한 말이었지만 그녀는 분명 떨고 있었다. 전환 시험이 자리 잡기 전까지는 이런 자리가 생기면 직원들이 다 같이 분개하고 소리치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다들 서로의 시선을 피하기 바빴고, 그저 이 자리가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의 일갈에 누구도 응원 섞인 눈빛을 보내주거나 함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녀가 말을 뱉은 후의 강당은, 전무이사가 대답을 위해 마이크를 들어 올릴 때까지 고요했다.    

 

“일단, 이렇게 말씀을 드릴게요. 본인도 중요한 것이 많겠죠.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회사에 대한 존중입니다. 존중. 요새는 영어로 리스펙트라고들 하죠? 하하. 리스펙트, 중요한 가치입니다. 제가 전무이사이지만 우리 직원분께 존댓말을 써드리는 것, 존중입니다. 그처럼 우리 직원께서도 존중하셔야 합니다. 회사를 존중하십시오. 그래야 본인도 있는 겁니다. 자, 여러분들이 그렇게 들어오고 싶어 했던 우리 회사, 왜 들어오고 싶었습니까? 대외적으로 이름도 날리고, 평판도 좋고, 연봉도 높으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회사를 그렇게 만든 것은 누구입니까? 바로 직원분께서 지적한 우리 세대입니다. 네. 그걸 무시해서는 안 되죠.”     


전무이사의 말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는 질문을 했던 A씨의 동기를 사람들 사이에 세워둔 채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렸을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대학교 학위를 어떻게 힘들게 취득했는지, 회사에 들어와서도 야근 수당 없이 며칠 밤을 새우면서 일했는지 등등. 그 긴 이야기 끝에 그가 한 말은 결국 회사와 본인의 세대를 존중하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질문하신 직원분 나이가 어떻게 되죠? 이십 대 정도로 보이시는데. 저희 애가 이번에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러니까 제가 직원 분 아버지 뻘인 거죠, 거의. 허허허. 저도 자식처럼 저희 직원분들을 항상 생각하고 있으니까, 우리 직원께서도 부모님을 보실 때처럼 절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무쪼록 제 말의 취지를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전무이사의 말이 다 끝나고 나서야 A씨의 동기는 자리에 앉았다. A씨는 그녀의 얼굴을 살피고 싶었지만, 그녀 역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인지 볼 수가 없었다.     


“자, 그럼. 일단 말이 길어졌으니까, 간단하게 한 마디만 더 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A씨는 손을 들었다. 그의 동기와 마찬가지로 작게 떨리는 손을, A씨는 어깨까지 위로 내밀면서 높게 들어 올렸다. 이사는 헛기침을 하며 단상 위의 직원에게 지시했고, 곧 사람들의 손을 거쳐 마이크가 그에게 주어졌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다만 이사님께서도 지금 직원들이 처한 상황을 아실 겁니다. 상세히 설명이 되어있지 않았던 입사 공고를 보고, 또 면접에서 구두로 약속받은 것들을 보고 지원한 직원들이 받아야 할 대우를 제대로 받고 있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저희가 이사님을 부모님으로 모시듯, 이사님께서도 저희를 친자녀처럼 사랑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여쭙고 싶습니다. 자녀가 이런 처우를 받고 계신다면 가만히 계실 것인가요?”


항상 긴장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던 A씨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마이크를 잡고 있던 손은 여전히 작게 떨고 있었지만, 적어도 말하는 순간만큼은 A씨는 조금의 긴장도,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 앉은 사람들의 움직이지 않는 뒤통수와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인자한 표정의 이사의 얼굴을 눈에 담은 채, A씨는 침착하게 말을 마쳤다. 마이크를 다시 다른 사람에게 건네는 두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을지언정, A씨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고요해진 마음으로 전무이사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이크를 가지고 빙빙 돌리면서 한참 생각을 하던 그는 이내 한 손으로 마이크를 잡은 채 입에 갖다 댔다.     


“일단 지금 시국에 대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시국이요. 요새 우리 사회가 얼마나 취업이 힘든 사회인지, 그런 것들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 직원 분들은 좋은 회사에 다녀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경향이 있어요. 아, 절대로 제가 훈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자부심을 가져도 돼요. 우리 회사에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효도를 한 겁니다. 잘하셨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냥 하는 말이지만, 우리 애는 이번에 의대에 들어갔습니다. 여러분도 자식이 없다면 최대한 빨리 낳으시고, 자식이 있다면 잘해주세요. 자식 잘 키우는 거야 말로 진정한 노후대비입니다. 연금이니 저축이니 소용없어요. 허허허.”     


그 뒤로 이어진 노후 대비와 관련한 이야기를 듣다가 A씨는 결국 이사의 말이 끝나기 전에 먼저 자리에 앉았다. 닿지 않은 것이다. 그와 동기가 용기 내서 건넨 질문은 회사 외벽에 달걀을 던진 것과 같았다. 아무런 메시지를 전하지 못했을뿐더러, 그저 그들에게는 지우기 번거로운 얼룩과 악취에 불과했던 것이다. A씨는 노조를 탈퇴한다던 동기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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