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부담
아침에 일어나 키위를 자르고 식빵을 구웠다. 머그잔에 더치커피액과 우유를 섞었다. 아침을 먹으면서 세바시 박상미 교수편을 본다. 이 사람의 목소리만 들어도 뭔가 떨림이 있다.
작년 쯤 박상미 교수에게 밤늦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고 한다. 구남친(교수의 표현으로는 '썅놈')이었다. 녀석의 말 "네가 이렇게 잘 될 줄 모르고 상처줬던 것 미안해. 사과하고 싶어서 연락했어."을 듣고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넌 몰랐니? 난 알았어!" 그 말이 너무 통쾌하고 귀여웠다.
나는 반대였다. 만났던 사람들은 나에게 "넌 잘 될 거야."라고 해줬다.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건 오히려 나였다. "난 알았어!" 교수의 그 외침이 내 가슴에 파동을 일으켰다.
어제 저녁도 어김없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누워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다가, 그 생각을 더 파고들어볼까 하다가, 차라리 일찍 잠드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일찍 잤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뭔가를 하자고 다짐했는데,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났다.
아침 기분은 좋다. 매일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런데 저녁만 되면 기분이 안좋으니까 이상하고 힘들다. '아, 나는 저녁이 되면 기분이 안좋구나' 하면서 받아들이기에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왜 그래야 하지? 얼마든지 자유롭고 반짝이는 시간일 수 있는데. 저녁에 이름을 붙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을 붙여가다 보면 조금씩 이해가 되지 않을까 해서.
막막했다. 적절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녁의 이름은 뭘까. 알 수 없는 거대한 덩어리일 뿐이었다. 알 수 없는 거대한 덩어리. 여기서부터 출발해보기로 했다. 알 수 없는 거대한 덩어리인데 왜 맨날 이것 때문에 힘들까. 스스로 많이 내려놨다고, 많이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나는 나에게 거대한 기대를 걸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려놓은 것이 있긴 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은 건 아니다. 살아있는 한 그럴 수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가진 거대한 기대를 없는 것으로 여겨왔던 것은 아니었는지. '낮에는 직장에 있으니까 저녁에는 너 자신의 일을 해야만 해' 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것 아닌가? 하지만 '저녁의 일'이 너무 거창하고 위대해야 했던 게 아니었는지 돌아본다. 생각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남들이 낮에 일하는 만큼 너는 저녁에 그렇게 일해야 해. 낮에 하는 일은 네 일이 아니잖아. 넌 저녁에도 뭔가를 해야 해. 그래야 살아남을 구멍이라도 발견할 수가 있어.' 스스로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걸 쓴다는 게 부끄럽다!)
누군가에게 저녁은 '즐기는 시간'일 수도 있다. 나에게 저녁은 '내 일의 시간'이었는데, 나는 그걸 즐기지 못했다. 그렇다고 일을 한 것도 아니다. 가만히 누워서 일을 하지 않는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시간이었다. 어제 저녁의 이름은 명백히 [부담]이었다.
'한 문장만 써도 돼' 라는 말은 진짜 한 문장을 쓰라는 말이 아니었다. '한 문장을 쓰기 시작해서 한 편의 글을 완성해야 해'라는 주문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 문장을 쓰는 것이 그토록 어려웠다. 진짜 진짜 한 문장만 써도 괜찮은 날이 올까? 모르겠다. 하지만 우울해지는 저녁이 또다시 찾아온다면, 이렇게 생각해봐야겠다. 나는 지금 나를 압박하고 있구나.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거야. 그건 혼잣말이 아니라 대답이었다. '넌 이런저런 일들을 해야 하잖니!' 하는 압박에 대한 대답. 시작은 가벼워야 한다. 하다보면 자연히 다음 단계로 넘어갈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크고 무거워서 시작을 못하고 있다. 알 수 없는 거대한 덩어리를 잘게 잘게 쪼개내야 한다. (안다. 사실 나는 이걸 잘게 쪼개는 것조차 못마땅해 한다는 걸...)
나는 매일 낱말을 수집하고 있는 것 같다. 다음 단계는 이 낱말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는 않은 듯 하다) 오늘 저녁의 이름은 뭘까? 여전히 낱말을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