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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Feb 20. 2024

짜증의 순번

인생은 돌고 돈다. 그리고 짜증도 돌고 돈다. 여기 짜증을 수집하는 한 가족이 있다.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사라지는지 도무지 그 종적을 알 수가 없는 짜증의 경로. 그 경로를 차단하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경미한 짜증에서부터 보통 짜증, 왕짜증까지. 차분히 그 단계들을 하나하나 밟아가는 우리네 삶의 모습을 이곳에서 확인해 본다.


"아니, 그걸 그렇게 작게 뜯으면 어떡해?"

발단은 주먹밥 가루가 나오는 사소한 봉지 하나에서 시작한다.

"뭐?"

나는 조들 밥을 비비던 숟가락을 내팽개친다. 화장실로 들어가서 아이들 코나 닦던 손을 물에 씻는다. 왠지 눈가에서 물방울 하나가 찍 나올 것만 같다.


나는 여기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아침부터 이모는 동생네 집에 와서 땀을 빼고 앉아 있다. 베이비TV를 틀어 소피와 히파와 바우와우가 나오는 동영상을 찾아서 틀어 주고, 이불을 한쪽으로 갠다. 어린이집에 가져가야 한다는 우유도 봉지에 밀봉하여 가방에 잘 담는다. 그러다 아이들 아침 준비로 분주한 부엌으로 이동한다.


"아니, 그걸 그렇게 작게 뜯으면 언제 다 뿌려. 밥이 이렇게나 많은데 조금씩 뿌리면 어떡해.”

아무 이유 없이 종로에서 뺨을 맞은 기분이다. 주먹밥 가루가 나오는 봉지 입구를 너무 작게 뜯었고, 게다가 팍팍 뿌려서 비벼야 하는데 너무 조금만 넣었다는 것이다. 어린이집에 가야 할 시간은 바투 다가오고, 나는 그 시간을 방해한 원흉이 된다. 바쁜 아침 시간, 지금 이 육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아이들의 주먹밥을 제대로 비비는 일뿐이다. 오직 그 일만이 이 아침을 제대로 보내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이 육아 왕국에서 그것을 제대로 수행해 내지 못한 신하 이모다.


"야, 씨. 네가 해, 그럼."

봉변은 갚아야 제맛이다.


이모는 동생의 '짜증받이' 역할을 전면 거부한다. 종로에서 뺨을 맞은 이모는 한강에 대고 눈을 흘기기 시작한다. 뽀로로가 예쁘게 그려진 숟가락을 던진다. 숟가락이 주먹밥이 담긴 그릇을 떠나 아무렇게나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뽀로로 숟가락은 오늘 이모의 '짜증받이'가 된다.


어제까지만 해도 '영혼 없는 육아'는 거부하던 이모다. 그 나름대로 육아 인력으로서 칭찬까지 듣던 이모였단 말이다.

"네가 애 돌보는 우리 집안사람 중에서 제일 잘 참는 것 같다."

쌍둥이 할아버지, 곧 우리 아버지의 말씀에 나는 뿌듯하게 웃었다. 꽤나 육아 인력으로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뿌듯함도 잠시.


나도 점차 다른 이들처럼 지쳐 갔다. 동생은 동생대로 힘이 들고, 엄마는 엄마대로 힘이 빠져 있었다. 서로 힘을 내야 할 상황이었지만 서로 돌아가며 상대의 힘을 쭉쭉 빨아먹고만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들이 그러했다. '쌍둥이 육아'라는 소용돌이 안에서 엄마와 동생, 그리고 곁다리인 나와 아버지까지도 이리저리 뒤엉키고 있었다. 우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기를 낳고 나서 동생은 갑자기 여자에서 엄마로 훌쩍 건너뛰었지만, 다시 평범한 성인 여자가 되기로 하고 썩힐 수 없는 능력을 타고난 복, 혹은 죄로 멋지게 제 일로 복귀했다. 하지만 세상이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혼자 제 할 일을 씩씩하게 잘 건사하던 동생이었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그냥 '결혼 안 한 여자' 혹은 '결혼했지만 애 안 낳은 여자'였을 때처럼 일을 하려 드니, 모든 사람에게 '도와주세요', '살려 주세요'를 외쳐야 할 판이었다.


아이를 낳은 후 동생은 매일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아쉬운 소리 끝에 모셔온 육아 인력들에게 동생은 자기도 모르게 툭툭 짜증을 내뱉었다. 물론 자신의 본의가 아니다. 불순한 저의도 없다. 그냥 그러는 거다.


그저 모든 것이 다 힘들어서 그런다.


동생은 하루하루 쓴 물을 삼키며 살아가고 있다. 아마 육아를 맡은 인력 가운 자신이 늘 최종책임자여야만 하는 현실 탓일 것이다.(이것은 나도 참 의문이다. 왜 우리는 마지막 책임을 그녀들에게 돌려야만 하는가.) 막강한 의사 결정력과 책임감을 동시에 지녀야 하며, 제일 쓰디쓴 물을 마셔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육아의 쓴 물에 관해서라면 우리 엄마도 만만찮다. 엄마도 어느 날 갑자기 쌍둥이 할머니가 되었다. 주변에서 '쌍둥이 키워 준다는 소리 함부로 하는 것 아니다'라는 귀한 조언을 듣고도 엉겁결에 쌍둥이를 모셔 왔다. 두 쌍둥이 어르신들 덕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고 허리 한번 제대로 펼 날도 없었다. 아이들이 정말 사랑스럽지만 살림과 육아를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는 일은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노부부의 몸이다. 하지만 아주 어린 아가들을 키우는 신혼부부처럼 아가들 육아에 목을 매듯 몰입한다. 게다가 이 쌍둥이 할머니에게는 딸내미에, 그 딸의 남편에, 게다가 시집도 안 가고 들러붙어 있는 또 다른 딸내미 하나까지 매달려 있다. 살점을 뜯어먹는 여러 어른까지 엄마의 피를 쭉쭉 뽑아내 버리고 있다. 동생이 스무 살 적에, '절대 엄마한테 애 안 맡겨. 엄마, 힘드니까.'라고 하던 그때를 회상해 본다. 그 약속은 자연스럽게 파기되었다.



우리 아버지는 또 어떠신가. 매일 하루 한 번, 한 시간 반씩 힘차게 운동을 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쌍둥이가 태어난 이후로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친구분들 모임이 있으시면 바쁜 마음으로 다녀온 후, 아이들을 데리러 가신다. 자식들 키울 때도 안 하던 육아다. 나이 들어서 노구를 이끌고,

"노를 저어라. 노를 저어라."


섬에서 나고 자라서 노 젓는 일을 많이 보아 오신 쌍둥이 할아버지는 아가들을 재우기 위해 두 팔로 아가를 앉고 큰 목소리로 이렇게 외치고 다니신다. '노를 저어라. 노를 저어라.' 아가들은 할아버지 자장가를 들으며 꿈속으로 달아날 때, 노를 하나씩 가지고 간다. 그 꿈속에서 아가들은 할아버지 목소리에 맞춰 노를 젓는다. 할아버지도 아가들 두 녀석이 잠들 때까지 계속 계속 노를 젓는다. 그러다 보면 할아버지는 아가들을 안고 있던 두 팔이 종종 뻐근해 온다.



"처형. 오늘 무슨 일 있으셨어요?"

제부다. 아내와 처형의 싸움을 눈치챘나 보다. 싸움의 근원과 동태를 파악하려는 문자다. 현장에 없었던 자에게 현장 검증이란 어려운 법이다.

"아니, 말꼬리에 짜증을 달고 말을 해서요. 물론 힘든 거 알지만 그래도……."

그래도 왜 나한테 지랄일까요,라는 말끝은 속으로만 삼킨다.


"원래 ○○이가 좀 짜증이 있긴 하잖아요."

적의 적은 내 편이라 했던가? 급속히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러나 적의 세력이 불어난 것을 알아차렸는지 동생 녀석이 통 연락이 없단다. 자칫 잘못하다 이 녀석, 오늘 늦게 들어오는 건 아닐까? 이모, 괜히 성질 한번 잘못 냈다가 혹독히 '독박육아'에 빠질지도 모른다. 물론 동생은 하루 종일 일이 있었을 테고, 언니라는 꽁한 자의 '욱' 때문에 종일 신경이 쓰이고 화딱지도 났을 것이다. 대체 내가 왜 이러고 사나 싶었을 터다.

"자기 찾지 말라 그러더라고요. 어디 혼자 애들 잘 키워 보라고."


동생에겐 제부가 죄인이다. 결혼을 하자고 한 당사자기도 하고, 동생을 너무 사랑한 죄가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들은 제부는 난감할 것이다. 그냥 동생을 좋아했고 사랑했고 결혼했다. 그러다 이렇게 된 것뿐이다. 

그런데 가만 보니 '어디 혼자 키워 보라.'라는 말은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바로 육아 보조 인력들이 욱할 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쌍둥이를 이렇게 쉽게 키울 수나 있느냐고, 우리 동생 없는 데서 가끔씩 '뒷이야기 꽃'을 피우곤 했다.


가만있자, 그런데 우리에게 과연 동생이 죄인이었던가?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간헐적으로만 밥벌이를 해대는 언니 덕에 동생 혼자 벌어야 했던 적도 있었다. 못난 언니에, 이제는 자식들까지. 동생 어깨에 멘 가방이 무거워진 것은 결코 동생 탓이 아니다.


우리 가족 중에는 어느 한 사람도 죄가 없다. 누구도 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육아'라는 동그라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서로서로 짜증의 화살표를 긋는다. 한 짜증이 이쪽으로 날아가면, 다른 쪽에서 또 다른 곳으로 짜증을 내보낸다.


한 번은 쌍둥이 할머니 차례.

"아, 애들이 진짜 어찌나 말을 안 듣는지 너무 힘들다니까. 도저히 둘을 혼자서는 못 봐, 못 봐."

그다음엔 쌍둥이 할아버지 차례.

"(애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겨우 한숨 돌리고 있을 때다. 할머니가 갑자기 무언가를 제안하신다.) 장 보러 거기까지 가자고? 안 가. 나중에 가, 나중에."

쌍둥이 할머니는 운전을 도맡아 해 주시는 쌍둥이 할아버지를 꼬일 생각이지만 할아버지도 쉽게 넘어오시지는 않는다. 이미 육아로 지친 몸이시니까.


그리고 동생의 차례. (물론 동생의 차례는 제법 자주 돌아오며 차례를 지키지 않고 불쑥 치고 들어오기도 한다. 이해한다. 동생이 일차적인 당사자기 때문이다.)

"아니, 약봉지에 있는 걸 확인하고 약을 먹였어야지. 약이 하나 더 있다고 쓰여 있는데 없잖아. 약국에서 약 받고 확인 안 했어?"



그리고 이번엔 이모가 밥숟가락을 던진다. 이번엔 뽀로로 친구 크롱이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아, 씨."

가방을 챙겨서 '씨' 뒤에 붙일 말을 혼자 곱씹으며 신발을 챙겨 신는다.

"내가 뭐라 그랬다고 그래?"

저 뒤로 배경음악처럼 사라지는 동생의 말이 이젠 잘 들리지도 않는다.



드디어 내게도 짜증을 낼 차례가 돌아온다.

짜증은 아침저녁을, 장유유서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그리고 기어이 고놈은 나에게도 찾아온다.



(사진: OpenClipart-Vectors,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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