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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Feb 27. 2024

돈이 없지, 패기가 없냐

"자녀분 축구화 찾으세요?"

매장 직원이 내게 묻는다.

"아니요. 제가 신을 건데요?"

의아한 표정이 나를 향한다. 굳이 시선을 피하지는 않다.


'해 보고 싶다'라는 말만 뱉어 놓고 해 보지 않은 일들을 생각한다. 누가 지나가는 말로라도 나를 말리면 '그, 그렇긴 하지?' 하며 망설임의 문을 굳게 닫았다. 그 "Close the door."의 순간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일들에 번호를 매긴다. 그중 특별히 돈이 들어가는 일들에는 검은 줄을 긋는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다. 검은 줄이 없는 나머지 것들도 꽤 남았다. 그 번호들에 내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단단히 나를 단속한다. '그걸 왜 해?' 그 말을 건네는 세상에 흔들리지 않기 위하여.


끈을 꽉꽉 조여 맨다. 이렇게 해야 숨이 더 막힐 것이다. 괜찮다. 이제 좀 숨이 가빠야 할 시간이니까. 눈앞에는 풀밭이 계속 이어진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더 먼 구석으로 달린다. 지금까지 내가 누구였던 건 상관없다. 더 빠른 속도로 날 내몬다. 더운 숨이 온몸을 타고 흐른다. 등줄기에 땀이 가득하다. 아무도 나에게 태클을 걸지 않는다. 내가 일을 저지르리라곤 생각지도 않겠지. 그래서 난 더 자유롭게 멀리로 달아난다. 조금만 더 지나면 곧 끝장이 날 것이다. 

점점 더 숨이 끊어질 듯하다. 뙤약볕 아래, 적당한 장소를 물색한다. 녹록지는 않다. 나는 더 달리고 달린다. 누군가에게 아마추어 같은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다. (물론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라운드에 서 있는 모습 자체가 '본투비 아마추어'일 테니.)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내 하늘은 점점 노래지다 못해 하얘진다. 내 심장 한구석이 픽 쓰러지려고 한다. 그래도 다시 일어난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다. 하지만 난 뛰고 있다. 그때 사람들이 나에게 마구 외친다. 

"이쪽으로! 아니 그쪽 말고 저쪽으로!"

"처음 해 보는 솜씨인데?"

"오늘 온 초짜야. 그러니 솜씨가 서투르지."

"자기는 골대 쪽에나 있어."

"공격수를 하기엔 정말 무리야."

"수비수를 하기엔 더 무리지."

여기 온 거 자체가 무리군. 나는 그들 무리에 끼지 못하고 무리수를 던진 나 자신을 슬슬 원망하기 시작한다.


"선크림이라도 좀 바르지. 여자들에게 자외선은 적이라고."

"그래, 공은 차 봤어?"

"뭐? 공을 차 본 게 오늘이 처음이라고?"

"그런데도 온 거야? 음……. 왜?"

"그냥? 그냥이라고? 그냥 해 보고 싶었던 거여서?"

네. 그냥 공을 차고 싶었어요. 그러면 안 되나요? 


어떤 여자가 축구화를 찾으러 돌아다닌다. 자식 낳아서 축구를 시켜야 할 나이에 본인이 축구를 하겠다고 겁도 없이 나선다. 

"축구를 하게는 안 생기셨는데."

축구를 하려면 좀 더 멋있게 생겨야 하는 건가? 축구를 하게 생긴 외모가 어떤 외모, 어떤 나이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일단 무작정 저 풀밭 위를 숨 막히도록 뛰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그러면 속이 좀 시원해질 것 같으니까.

"그래, 나가 보니 어떻디?"

내가 진짜로 축구를 하러 나갔다는 말에 친구가 놀라며 묻는다.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더라고."


나는 내가 축구에 영 소질이 없었음을 깨끗이 인정한다. 그러나 소원이 반쯤 이루어졌음도 부인하지 않는다. 풀밭 위를 숨 막히도록 뛰고 싶었던 딱 그만큼 숨이 턱턱 막혔고, 태어나 처음으로 하얀 현기증이 일어났다. 또한 속이 좀 시원해질 것 같았던 내 바람도 이루어졌다. 속이 텁텁하게 달아오르던 그 와중에도 나는 꽤 절망적일 만큼 시원했다. 땀이 나도록 달리면 내가 바람을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나는 그날 바람을 만들었다. 바람은 불어올 수도 있지만 가끔은 내가 만들 수도 있는 거였다. 



그 후로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우연히 들어가 본 그 동아리 카페에서 여전히 '나'란 사람은 축구복과 축구화를 신고서 어색한 작전 회의를 하고 있다. 사진은 박제되었고 '아, 나만 안 보면 돼'라는 생각으로 그냥 인터넷 창을 내려 버린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공을 찰 줄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 공을 전혀 다룰 줄도 모르는 사람이 호기롭게 어시스트까지 기록했다. 그날의 기억은 '하얗고 노랗게' 숨이 찰 만큼 아찔하고 달콤한 기억으로 남았다. 나는 앞으로 그 정도의 바람을 만나기 어려울지 모른다. 



 "서고도 정리해야 하고 이게 생각보다 힘이 많이 필요한 일이에요."

"저, 보기보다 튼튼합니다."

나는 오늘 도서관 단기 근로자(일용 인부)에 지원한다. 나는 팔씨름은 곧잘 한다. 그래서 지금 나는 그 팔 힘으로 책을 나를 수 있다고 당당히 말하는 중이다. 나를 믿어 보시라, 눈빛에 힘을 준다. 단기 일용직. 어감이 주는 굳셈에 주저하지 않고 이곳, 도서관에 원서를 냈다. 무엇에든 부딪히고 싶다. 몸을 써야 한다면 작은 몸을 부수어 쪼개어서라도 쓰고 싶다. 이제 무엇이든 해야 할 시점이라고 느낀다.

"집도 가까우신가 봐요?"

 집이 가까운 곳에 지원하기는 처음이다. 그래서 내 목에는 더 힘이 들어간다. 고작 18일이면 끝날 일이라지만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도서관에서 일해 보는 것은 내 인생 로망 중 하나였으니까!

"네! 가깝습니다."


이제 내 길을 좁히고 싶다. 훗날 나에게 도움이 되겠지, 하며 이것저것 보험 들 듯 자격증을 따던 나, 무언가를 배워만 두던 과거의 나를 버리려 한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하지만 정말 이제는 내가 타 먹을 수 있는 보험만 들고 싶다. 아니, 앞으로는 보험 생각 안 하고 내가 할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다. 이제는 그런 것쯤 마음대로 해도 될 나이 아닐까? 

이제 한곳으로 길고 깊게 좁혀서 내가 좋아하는 일들로만 나의 생(生)을 채우고 싶다. 그나저나 도서관에서 일하려고 하면서 사서 자격증은 있는 거냐고? 아니, 없다. 단기 일용직은 없어도 된단다. 지금 나는 허드렛일을 한다고 해도 이곳에 좀 붙어 있어야겠다. 열정페이 받을 나이 지났다고 비웃어도 이제 다시 열정페이에 패기를 더하며 일하고 싶다. 백수의 무기력을 털고 도서관에 내 패기를 들이민다. 그러니 날 좀 뽑아 주오. 도서관 단기 일용직 근로자가 되고 싶소.

 

"네! 이 도서관 회원이어서 아주 자주 와요. 집도 가까운 편입니다. 전철로는 두 정거장이고, 집에서 전철도 엄청 가까워요."

해도 될 말,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가리지 않는다. 누가 봐도 아무렇게나 말하는구나, 싶도록 단어들을 우선 뱉고 본다. 면접관들은 나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지도, 나의 패기에 의아한 반응을 보내지도 않는다. 

"응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에 돌아가 계시면 합격하신 세 분만 연락드릴게요."

여기저기서 네,라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린다. 여덟 명의 사람 중 합격하지 않은 다섯 사람은 연락을 받지 않는다. 그게 세상의 이치다. 백수들은 그 이치를 배우는 데 온 생을 쏟으며 살아간다.


도서관 밖을 빠져나와 공터로 들어선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작은 공을 차며 자못 심각하게 소리를 친다.

"야이씨, 이 바보야. 이쪽으로 찼어야지!"

아이들은 욕을 하며 서로에게 패기를 쏟아 낸다. 그런데 이 작은 놀이터에서도 축구화를 신은 녀석이 눈에 띈다. 동네 공놀이인데도 이미 그 녀석 마음은 축구선수다. 


나는 지금 축구화 대신 뾰족한 구두를 신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무작정 축구화를 사고 공을 차고, 얼결에 황당한 어시스트도 기록했던 그때의 나는 어디로 갔을까? 숨 막히도록 뛰다가 하늘이 하얘졌던 그때의 나는 어디에 있을까? 



"이거, 커서 네 조카들 주면 되겠다. 으흐흥."

농담을 하다 말고 엄마가 축구화를 들어 보인다. 조카들이 쪼르르 축구화 쪽으로 몰려온다. 나는 폐기하기 전 한 번만 더 패기 있게 이것을 신어 보자는 마음으로 아주 오랜만에 내 발을 축구화에 정성껏 욱여넣는다. 그라운드를 누볐던, 혹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잔디 위를 어설프게 걸어 다녔던, 그때의 그 축구화를 다시 신는다. 

"다시 신었는데도 감쪽같이 잘 맞는구먼?"

나는 나에게인지 조카들에게인지 모를 말을 건넨다. 


"이뭐어어어.(이모오오오오)"

내 주변으로 몰려왔던 조카들이 제 발에 신겨 달라는 듯 나를 쳐다본다. 나는 패기 한 짝씩을 조카들에게 신겨 본다.



그날은 밤이 늦도록 도서관에서 연락이 없다. 그래, 나 이제 단기 근로자, 일용 인부 자리도 떨어져 본 사람이다! 이제 무엇이든 못하랴? 

나는 이렇게까지 떨어져 보고서야 비로소 내가 신었던 패기를 되찾아 신는다. 생각보다 내 발에 아주 잘 들어맞는다. 다시 인생에 숨 막히는 순간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이렇게 다시 달리면 된다. 인생이라는 축구장을 누비자. 까짓 숨차도록 다시 달려보는 거다. 돈이 없지 달릴 신발 하나가 없겠냐.


나는 오늘, 잃어버렸던 내 패기를 다시 신는다.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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