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무대는 불을 켠다. 생을 만 2년도 살지 않은 조무래기들이 고사리보다도 작은 손가락을 꾹 움켜쥐고 무대에 오른다. 저기 멀리서 이모 인생의 첫 아가 둘도 걸어 나오고 있다. 이상한 초록빛 요정 복장을 하고서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들이 가득한 객석을 검은 눈으로 바라다본다. 사회자는 울어도 작품, 춤을 추어도 작품이라며 너희를 보고 한껏 크게 웃는다. 너희를 뺀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웃는다. 아장아장. 너희가 걸어온 만 21개월의 삶은 작고 귀여운 ‘아장아장’의 연속이었다.
이모라는 자도 부리나케 너희를 보러 달려간다. 한창 아르바이트 중이지만 팀장님에게 2시간 조기 퇴근을 쉽게 얻어낸다. 이모는 순전히 너희를 보러 달려가는 것이다.
“무슨 일 때문에 조퇴하시나요?”
라고 물어왔다면 쑥스러울 뻔하였다. 나는 순전히 조카 재롱잔치를 보러 가는 것이다. 너희들이 만드는 생애 첫 무대를 보기 위해 말이다.
"조카들 재롱 보려고 조퇴합니다."
이제 곧 너희의 무대를 시작한다. 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너희를 찾는다. 너희는 굳이 찾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한눈에 알아보겠다. 어디서건 이 이모의 눈에는 너희가 보인다. 아주 멀리 있다 하더라도 너희는 언제든 이모 앞에 있는 듯하다. 그건 너희와 이모만이 아는 마법 같은 일이다. 한 명씩 두리번두리번하며 큰 무대를 오른다. 어린이집 재롱잔치치고는 심하게 판이 크다. 내 심장이 다 두근거린다.
곧이어 객석의 깜깜한 눈빛들이 너희를 바라본다. 원하지 않는 무대에 갑자기 들어 올리어진 너희라는 별빛들. 너희는 검은 두 눈을 들어 어두운 객석을 다시 올려다본다. 작은 체구 속 커다란 눈망울 두 개가 너희를 바라보는 수백 개의 눈과 마주친다. 너희 눈 속 별빛들과 사람들의 눈빛들이 충돌한다. 이쪽에서 시작된 시선들이 저쪽에서 만났다가 부서지고, 또 그렇게 다시 만났다 부서지며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인다. 너희와 우리는 계속해서 마주친다. 하지만 그 마주침을 눈치채는 쪽은 우리뿐이다. 너희는 우리를 찾지 못한다.
그 어떠한 것들도 생각할 수 없는 21개월이란 나이. 아직 2년을 채 살지 않은 너희들의 생(生), 그것이 큰 무대에서 예고도 없이 갑자기 펼쳐진다. 그리고 이제 곧 음악. 무대는 ‘즐겁게 춤을 추다가’라는 음악을 너희에게 떨어뜨린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너희 위로 쏟아진 폭풍우 같은 음악들은 ‘그대로 멈춰라’, ‘그대로 멈춰라’를 연신 쏟아 낸다. 음악이 나오자 너희는 정말 더더욱 거짓말처럼 노랫말 그대로 음악 속에서 굳어버린다. 그대로 멈춰 서 버린 너희 둘. 뜨거운 무대 조명 아래 얼음처럼 굳어버린 너희의 시간, 너희의 몸짓, 너희의 표정, 너희의 말갛고 고운 그 두 눈. 그리고 맞닿은 채 떨어질 생각을 않는 너희의 윗입술과 아랫입술. 거기에다 도무지 서성거릴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무대와 착 들러붙어 버린 너희의 두 발.
얼음, 땡. 얼음, 그다음엔 땡!
‘그대로 멈춰라’에 맞추어 ‘얼음’이 된 뒤에는 다시 ‘땡’이어야 한다. 이제 즐겁게 춤을 추어야 할 순간이다. 음악은 너희에게 그렇게 가르친다. 그러나 어른들이 마련한 이 커다란 놀이에 너희들은 결코 흥이 나지 않는다. 무대 속으로 녹아들 줄 모르고 그렇게 한참 동안 너희들은 ‘겨울 속 동면 중인 얼음들’처럼 아주 그렇게 굳어 버린 채 눈꺼풀만 끔뻑끔뻑한다. 마음까지 일시 정지를 눌러 버린 듯한 너희의 그 표정을 보니, 나는 그만 애처로운 웃음이 가슴 한쪽에서 퍽퍽하게 피어오른다. 가슴 안에 저릿저릿한 이것은 무엇일까.
너희가 생에 대한 겁을 집어먹는 최초의 무대. 태어난 지 만 2년도 안 된 아이들에게 객석을 가득 메운 검은 눈빛들은 무슨 의미로 다가왔을까. 수백의 사람들은 대체 어떤 모습으로 너희의 눈에 쏟아져 내렸을까. 그것이 차라리 별빛이었다면 너희는 소리를 질렀을 테지. 환희와 반짝거림과 놀라움. 그러나 이 무대는 너희에게 아직 환호와 짜릿함을 안길 수 없다. 너희의 표정, 그것은 아마도 모든 두려움이 시작되는 최초의 표정일 것이다.
“여기 봐. 여기! 엄마도 오고, 아빠도 오고, 할머니도 두 분 다 오셨다. 할아버지도 이모도 왔어. 이쪽 좀 봐.”
이쪽을 보라 하기엔 객석이 너무 넓고 크다. 소리가 닿기 힘들고 마음은 더더욱 닿기 힘든 거리다.
“그대로 멈춰 라아앗!”
드디어 음악은 끝이 난다. 그렇게 너희는 집어먹은 겁은 도로 내뱉지 아니하고 천천히 무대를 돌아선다. 하나는 울고 다른 하나는 울지도 웃지도 않고 ‘그대로 멈춰 서’ 있다.
노래 하나가 끝이 났다. 하지만 너희의 무대는 이게 끝이 아니다. 다시 시작이다.
그렇게 무대에 멈춰 서 있는 너희 둘을 보면서 앞으로 얼마나 많은 무대가 너희 앞에 펼쳐질지 헤아려 본다. 조금 있으면 두 살, 세 살이 되고, 네 살이 될 테지. 그리고 초등학교에 가고, 그러다 조금 더 큰 학교에 가고, 언젠가는 더 새로운 사회를 만나야 할 시기가 온다. 너희는 차츰차츰 더 큰 어른이 되어야 할 시간들을 만날 것이다. 너희는 매번 새로운 무대에 올라서서 온몸으로 자기 생을 이리저리 시험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우리 가족들은 무대 뒤로 향한다. 무대 뒤에서 기어이 울음이 터져 엄마를 찾고 아빠를 찾고 이모까지 찾는 너희의 소리를 듣는다. 너희 둘 생애의 첫 무대는 그렇게 갑자기 시작된다.
잘했어. 잘하고 있어.
나 자신에게 했던 주문을 이번엔 너희에게도 쏟는다. 오늘 너희는 아무것도 안 했지만 정말 아무것도 안 한 것이 아니다. 아무 역할도 없이 끝이 나는 무대란 없다. 너희는 오늘 최선을 다해 두 발로 서 있었다. 최초의 무대를 온몸으로 맞아들였다.
나는 아직 채 말문도 트이지 않은 너희에게 어쭙잖은 당부의 말을 마음속으로나마 전한다.
너는 너의 무대에서 빛나는 휘장을 달 거야. 너는 그저 가장 아름다운 곳, 가장 찬란한 그곳에서 마음껏 노래를 불러 주면 돼. 가끔 ‘그대로 멈춰라’에 맞춰 생의 숨 고르기에 머물러야 할 때도 너희를 응원하는 함성과 눈빛들을 기억해. 너희는 생의 곳곳에서 빛날 수 있음을 단 한 순간도 잊지 말고 춤추며 기억해 주길. 이것은 너희와 생애 첫 1년을 함께한 ‘이모’라는 자가 간절히 전하고 싶은 최초의 부탁이야. 그리고 한 가지 더.
당황해도 돼.
원래 무대는 그렇단다. 어느 날 갑자기, 너무나도 갑자기 ‘무대’라는 녀석은 우리에게 찾아온단다.
“이모.”
“이모.”
너희의 그 ‘이모’는 영원히 너희를 응원할 것이다. 그것이 ‘이모’라는 무대에 홀로 선 내가 너희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도전이다.
(사진 출처: BlenderTimer@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