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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Feb 21. 2024

이력서가 사람을 패는 법

 눈에 훤히 보이는 적과 싸우는 일은 재미가 없다. 세상은 이모에게 재미있고 스릴 넘치는 삶을 주려고 자꾸 시험에 빠트린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혹은 시험에 제대로 통과하기 위해서는 패기 넘치는 얼굴이 필요하다.


패기에 찬 인생이 되기 위해 백수 이모는 용을 쓰며 패기를 다지고자 한다. 실패가 인생의 밑거름이 된다고 하면 이 이모, 거름 냄새, 충분히 장착했다. 자, 그럼 밑거름 속으로 파묻어 버린 지난날의 패기를 되찾아보자. 티끌만 한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어 버린 그 패기란 녀석을 샅샅이 찾아보잔 말이다.



(패기를 찾던) 백수 이모는 이력서를 작성하다 말고 키보드에서 그만 손을 떼어 버린다. 매번 썼던 이력서인데 갑자기 이력서가 쓰기 싫다.

종이 한 장일 뿐인데 이력서가 사람을 패고 있다. 내 자랑스러운 부모님이 '가족관계'라는 표 안에서 고작 숫자와 직업으로, 혹은 가방끈이 담긴 한 줄로만 압축적으로 정리된다. 그건 왠지 좀 많이 억울한 일이다. 요즘 세상에도 가족의 학력이나 직업을 묻는 이력서가 있다니.


아버지께서 멀쩡히 직장을 다니고 계실 때는 내가 많이 어렸고, 부모님께서 이런저런 다른 일을 하셨을 땐 내가 '다소 젊은 백수'였다. 그리고 나이 많은 백수가 되어 다시 이력서를 쓰려고 했을 땐 이미 부모님께서 생활 전선에서 물러나신 후였다. 이제 그나마 채울 수 있는 부분은 동생 부분이다. 나에게는 아직 동생이 남아 있다.


나는 오늘도 이력서 파일을 열어 별생각 없이 동생의 성명을 적고 나이를 적고 학력을 적는다. 그리고 '직업 및 근무처'에는 관련된 말을 써넣는다. 예전에 내가 백수일 때는 동생이 회사에 다니고 있어서 동생 회사의 이름을 당당히 적어 넣었다. 요즘은 동생이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다. 이번 이력서에도 '동생의 빈칸'만큼은 거리낌이 없다. 자연스레 '프리랜서 통번역사'라고 적어 본다. 이렇게 적고 나면 남들 보기 평범한 직업일지라도 왠지 모르게 동생이 더 자랑스럽다. 직업이 있다는 것 자체가 더할 나위 없이 자랑스러운 일이니까.


그동안 내 이력서는 나에게 "어이, 네 동생 뭐 해?"라고 물어왔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빈칸마다 '응, 내 동생 이거 해, 저거 해'라고, 동생을 써넣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갑자기 불시에 내 머리를 후드득 때리는 생각이 하나 있다.

'맙소사. 그 생각을 못 했네.'

그동안 숱한 이력서 양식에 맞추어 내 동생을 당당히 집어넣었건만 도무지 나는 여태까지 그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어이, 네 언니 뭐 해?"

동생에게 이런 물음이 따라왔다면?


동생이 이력서를 쓰던 날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을 다닐 때 동생은 '네 언니 뭐 해?'라고 묻는 이력서에다 무슨 이야기를 적어야 했을까. 이직을 하려고 새로운 직장 앞에 섰을 때, 가족관계가 포함된 이력서가 나타나면 어김없이 무언가를 적어야만 했을 것이다. 몇 년이 지나도 이력서의 '가족관계' 부분에서 '언니'라는 자리는 어쩔 수 없이 쭉 빈칸이어야 했다. 동생은 과연 어떤 식으로 나의 빈자리를 채워야 했을까?



경제적인 책임을 나누어져야 하는 부모님 생일이나 어버이날 같은 날에도 동생은 혼자서만 가족관계의 빈칸을 메우느라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다. 때로는 '우리가 같이 산 것으로 하자'라며 동생이 자기 혼자 사 온 비싼 목걸이를 나에게 내밀기도 했다. 보석을 좋아하지 않으시는 엄마지만 딸내미가 사 온 목걸이 앞에서 웃고 계시는 엄마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양심에 털이 나지 않은 관계로 나는 '사실 그 선물은 동생이 혼자 한 것이다'라는 말을 보탠다. 그것이 오히려 내 자존심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알량한 마음으로 자존심 타령이나 하고 있을 때, 동생은 세상이 던지는 질문들을 받아야 했다.

"언니는 여전해?"

여전히 되지도 않는 시험에 매달려 이십 대를 다 날려 버리질 않나, 조금만 더 참고 다닐 것이지 달리 다닐 곳도 없이 덜컥 제 맘대로 관두어 버리질 않나. 동생은 줄곧 '자리를 못 잡고 여전하기만 한 언니'를 둔 동생이었다. 손아랫사람도 아니고 손위 언니가 취업이든 시집이든 뭐라도 먼저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 언니란 자는 인생의 계단을 제대로 오르지 못하고 여전하기만 하다.


이런 식으로, 보이지 않게 언니가 휘둘러 왔던 폭력이 동생의 이력서에 자꾸 구멍을 만든다. 화려하게 채워 주진 못해도 한 줄이라도 더 보탬이 됐어야 했다.



나는 이내 이력서라고 적힌 파일을 닫아 버린다. 서류 한 장이 우리 집 가족관계를 통째로 '쥐어 패고' 있다. 가끔은 아주 내 인생을 송두리째 패대기치는 느낌이다. 특히나 옛날 이력서들 가운데에는 가족의 직업도 모자라서 직급까지 묻는 이력서도 있다. 점입가경이다. 대리라는 이름 한번 못 달아본 '언니'는 대체 이력서 어디쯤에 서 있어야 할까?



동생 보아라

아마 조금만 덜 못난(잘난 것은 바라지도 않고...) 언니였다면 너는 비행기에 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너는 조금은 험한 나라로 갔다. 너는 현장에서만 쓸 법한 안전모를 쓰고 작업복을 입었다. 너는 자랑스럽게 네 사진을 보내왔지. 평평하지 않은 땅들을 밟으며 너는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말을 옮겼을 거다.

다른 나라의 말을 곧잘 한다는 것은 참 ‘있어 보이는 일’이다. 하지만 그 있어 보이는 일을 하기 위해 너는 너 혼자 퍽 애를 많이 써 왔다. 부모님이 좀 얹어 주셨다고는 해도 너 혼자 해낸 일들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대책 없는 언니 다음에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넌 조금 더 우아하게 일할 수도 있었을 텐데, 거참 안 됐다. 나는 지금 새로 옮긴 직장에서 긴장의 고삐를 조이다가도 문득 널 생각한다. 열몇 시간이 넘어야 갈 수 있는 타국에서 2주에 한 번뿐인 휴식으로만 몸을 달래야 하는 너를 생각한다. 키도 덩치도 그 나름 큰 네가(여자보고 ‘덩치’라고 해서 어쩐지 미안하다만) 그 비좁은 비행기 좌석에서 쭈그리고 앉아 열몇 시간을 버티었을 것을 생각한다. 엄마, 아버지는 너를 외국으로 보낸 첫날 밤, 너의 덩치와 네가 보내온 비좁은 비행기 좌석 사진을 비교해 가며 끝내 깊이 잠들지 못하셨다. 나는 부모가 아니어서 잠은 꽤 쿨쿨 잘 잤다만 부모님은 마음이... 마음이 아니셨나 보다.

맏딸이나 장녀라는 말은 나보다 네가 더 어울린다. 그렇게 만든 게 왠지 나인 것만 같다. 원래도 큰 머리여서 무거운 내 머리를 오늘따라 더 숙연히 숙이게 된다. 어, 잠깐잠깐, 너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는데 엄마가 나한테 문자를 보내셨네. 잠시 확인해 보자.

<최○○ 님께서 애○팡에서 최고 점수 111,891점을 달성하셨습니다.>

네가 엄마에게 가르쳐 주고 간 게임^^;;; 엄마가 '게임 자랑' 문자를 보내셨다;; 너를 멀리 타지에 보내고 잠 못 이루시다가 애○팡에 빠지셨나 보다.

아무튼 우리 가족은 너를 걱정하고 너를 사랑하고 있다. 그 사실을 네가 가장 잘 알 것 같으면서도 혹여 가장 모르는 사람이 너일 수도 있겠다 싶어 알린다. 그래서 나는 네가 연수를 갔을 때처럼 매일같이 편지를 쓰려고 한다. 너의 제2 외국 생활을 응원한다. 다시 편지폭탄 맞을 준비를 하거라. 이만 총총.

                                        -9월 어느 날, 동생 같은 언니 씀



이력서 폴더 옆에 있는 편지 폴더를 들추니 내가 수년 전 컴퓨터로 썼던 편지들이 나온다. 무언가 텁텁한 마음이 들 때면 나는 동생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먼 타국에서 동생은 어떤 마음으로 이 편지를 읽어야 했을까.



내가 쓴 내 편지를 다시 읽고서야 알겠다. 나는, 쌍둥이 조카 녀석들을 돌보느라 힘들다며 동생의 마음을 요리조리 패고 다닐 처지가 아니었다. 그동안 나는 동생의 인생을 얼마나 소란스럽게 만들어 왔는가. 보이지 않는 묘한 폭력으로 말이다. 반대로 동생은 그동안 얼마나 자주 언니의 인생을 패대기치고 싶었을까. (패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귀찮았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은 자기 언니에게 질릴 정도로 수많은 채용공고를 뽑아다 날랐고, 심지어 기간제 교사에 대한 접수 일정을 엑셀 표로까지 만들어 내 숨통(?)을 조여 왔다. 깊은 구렁텅에 가라앉으려고 할 때마다 동생은 지치지도 않는지 나를 자꾸자꾸 물 밖으로 끌어 올렸다. (결과적으로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던 채용공고들이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나를 건져 올리려는 동생의 노력이 없었다면 아직 나는 수렁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어쩌면 이제 최고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격한 육아 후 찾아오는 이튿날 아침, 나는 두들겨 맞은 듯, 누가 날 패기라도 한 듯 온몸이 쑤신 아침들이 많아서,

"이제 애들 무거워서 안고 다니지도 못하겠네."

라고 볼멘소리도 해댔다. 또, 훗날 할머니가 되어 '애를 안 낳고도 육아하 몸이 망가졌다'라고 떠들고 다니게 생겼다고 허풍 떨듯, 유세하듯 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는 정말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진짜 제대로 된 기회를 맞이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동생이 나에게 꼬박꼬박 챙겨 준 몇 년간의 끈끈한 용돈과 끈질긴 우애를 일시에 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것은 바로,


조카육아!


내 앞에는 이제 조카들이 있다. 동생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왔다. 게다가 그 조카들은 내가 100을 주면 200으로 사랑을 도로 돌려준다.


동생은 이렇게 계속 동생만 밑지는 장사를 한다. 나는 다소 호구고 상당히 자주 백수였지만, '이모'라는 인생에 있어서만큼은 사업 수완이 퍽 좋은 장사꾼인가 보다.


오늘도 조카들을 돌보며 오히려 내가 더 큰 은혜를 입는다.

어쩌면 나는 이제, 더는 '호구이모'가 아닐지도 모른다.



(사진: OpenClipart-Vectors,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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