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책장봄먼지 Mar 01. 2024

모아 둔 돈 좀 있을 거 아냐?

"봄봄아, 없어도 갈 수 있어. 걱정 마."


걱정도 안 하지만, 없는데 굳이 갈 것까지 있나, 구태 나까지 그것을 사야 하나 싶었다. '시집' 말이다. 시집을 내 인생 책장 한 귀퉁이에 꼭 전시해야만 하는 걸까. 사촌 언니의 저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가로젓지도 않았다.


내게 없는 것이 어디 한두 개랴마는, 사람들에게서 아래와 같은 말을 들을 때면 흠칫 놀라곤 한다.

"모아 둔 돈 좀 있을 거 아냐?"

나이에 걸맞은 자산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스물을 넘기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임용고사 장수생으로 지냈다. 서른을 넘기고도 취업전선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 마흔을 넘기고도.. 이러다 쉰을 넘기고도, 예순을 넘기고도, 라는 소리를 하게 될까? 스물을 넘기던 그때 그 시절의 여파가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그냥 이어지는 정도가 아니다. 잔잔한 파동이 아니라 집채만 한 파고로 나를 집어삼키려 한다. 이럴 줄은 몰랐다. 만회나 반전의 카드 한 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은근슬쩍 나이만 먹었다. (정말 아무도 모르게 먹은 나이.)



A: "가족 꾸리고 살면 돈이 더 많이 들지 않겠어?"

B: "무슨 소리야. 혼자 산다고 돈 안 드냐, 돈이 더 들 수도 있는 거야!"

 

이십 대 중반. 동네 친구들과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나는 당시 A의 입장이었다. 그때 B의 입장이던 두 친구가 목소리의 음량을 키우며 에게 반발했다. '혼자'라고 '돈' 들어갈 데가 없을 것 같냐는 이야기였다. 외려 더 많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런데 그때 B였던 친구들은 지금 결혼을 했다. 아가들을 낳아 아기자기 북적북적 가정을 잘 꾸리고 사는 B와 달리, 결혼을 할 줄로 알고 이십 대를 희희낙락 보냈던 A는 지금 비혼의 무리에 끼어들었다. B의 입장이었던 내 친구들에게, 내가 다시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그들은 어떤 대답을 해 줄까.

이렇게 세상은 돌고 돈다. 그리고 한 치 앞도 리에게 내어주지를 않는다. (우리는 늘 세상의 뒷면만을 바라보고 달리는 듯하다.)



MZ 제자: 쌤, 결혼은 할 것 같은데 아이는 안 낳으려고요.

봄책장봄먼지: 그래. 근데 몇 년 후, 두둥. 쌤, 제 아이예요, 막 이러는 거 아냐?


내 청소년 제자는 이십 대 중반을 넘어왔다. 넘어오고 보니 생각이 많은 듯했다. 내 제자는 오래 사귄 연인뿐 아니라 그의 가족과도 친분을 잘 유지하고 있는 듯했는데, 자신에게 생긴 이 자연스러운 그림도 딱 '혼인'까지이기만 한 것 같단다. 그도 그럴 것이, 양육과 교육에는 감당해야 할 산과 바다, 건너야 할 첩첩산중들이 많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내 MZ 제자였다. 또한 가족의 숫자는 늘었는데 만약 한쪽 부모의 경력이 단절된다면 오히려 가정의 경제는 마이너스를 그릴 것이다. 즉, 미래의 내 MZ제자가 감당해야 할 몫에는 비단 '시간이 주는 주름의 고통'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돈'의 고통이, 고단한 모습으로 우리의 목을 조여 올는지도 모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그저 목이 졸린 채 목소리도 내지 말아야 하나, 아니면 죽는시늉이라도 해야 하나. 아니면... 비혼인 나, 혹 이런 방식으로라도 억울함을 토로해야 하나.


[빅데이터] "난 결혼안해" 비혼 선언하면 이미 낸 축의금 돌려받을 수 있을까 - 디지털데일리 (ddaily.co.kr)


이 기사에 따르면, '비혼들은 이미 낸 축의금은 못 받는 것으로 알고 포기해야 한다'는 의견이 70%를 넘었다. 비혼식을 거행하며, '돌려줘요, 내 돈' 하는 것에는 갑론을박이 일어났다고도 한다. 가끔 나도 가족에게서 이런 소리를 듣곤 한다.


"너는 주기만 하고 하나도 받지는 못하네."

"아니, 너한테(너 같은 비혼한테 아직도) 청첩장을 보냈다고?!!!"


가족들은 나 대신 '대리 분노'를 해 주기도 한다. 내가 택한 삶이므로 물론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그동안 건네드린 것들을 다시 돌려주시겠어요? 사람들이 자꾸 '모아 둔 돈 있냐' 묻는데, 그 '모아 둔 돈'에 합산 좀 해 보려고요." 이렇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말할 생각도 없고.)

자, 그렇다면... 처음으로 돌아가 그 '시집'이란 것을 분석해 보자. (나는 의문이 생기면 '단어' 자체로 돌아가는 버릇이 있다. 즉, 사전의 기본 뜻풀이에서 삶의 방향을 다시 고민한다.)


시집1: 남편의 부모가 사는 집.

시집3: 여러 편의 시를 모아서 엮은 책.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시집'이라는 표제어에 총 3개의 어깨번호가 붙어 있는데 그중 나의 이목을 끄는 단어는 '시집1'이 아니라 '시집3'이다.


그래. 시집1을, 내 인생에서 사지 않을 거라면,

그냥 나만의 시한 마음의 이라도 지어 보면 되지 않을까?

그저 나만의 시집3이라도 내어 보련다.



"모아 둔 돈 좀 있어? 그래서 어디 시집이나 갈 수 있겠어?"

"아니요. 그런데 모아 둔 시(詩)는 있어요. 그래서 어디 시집 하나쯤, 죽기 전에 (제 돈으로)  수는 있을 것 같아요."

그거면 좀 남는 장사가 아닐까?



나는 오늘도 이렇게 나만의 '시집'을 간다.




(사진 출처: pixabay)

이전 06화 한창 예쁠 때 결혼해야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