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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Feb 23. 2024

한창 예쁠 때 결혼해야지

한창 예쁠 때 결혼해야지! 이 말에 동의할 수가 없다.

첫째, 한창 예뻐 본 적이 없다. ('한창'을 빼고라도 그냥 예뻐 본 적도 없다.)

둘째, 한창 못생겼을 때는 결혼하면 안 되나?


어느 날, 친척들이 한창나이인데 왜 안 꾸미고 다니냐고 내게 물었다. 꾸밀 수 있는 나이가 따로 있다는 소리로 들렸다. 또 어느 날은 피정(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성당이나 수도원 같은 곳에서 묵상이나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살피는 일.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을 갔다가 연배가 있으신 선생님과 룸메이트가 되었는데, 최근 자기 아들이 결혼을 했다면서 서른이 안 된 며느리와 아들의 결혼식이 너무나 예뻤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나이 들어 결혼하면 안 예쁘다고, 훌쩍 나이 든 나에게 살뜰히 조언 아닌 조언을 해 주셨다.


나도 사랑의 마법과 외모의 상관관계에 놀란 적이 있다. 아는 동네 동생이 (원래도 예뻤지만) 무척 무척 예뻐져서, 심지어 길을 가다가, 지나치는 그 동생을 못 알아볼 뻔도 하였다. 원래 이 정도까지 예뻤었나, 할 정도였다. 알고 보니 동생은 사랑을 시작했단다. 그런데 새로 사귀는 남자 친구가 '한창 예쁜 나이인데 치마도 좀 입고 높은 구두도 좀 신고, 화장도 좀 하고 다니라고, 예쁠 때 꾸며야 한다'라는 지론을 펼쳤다고 한다. 어쩐지 패션과 화장이 좀 달라졌다 싶었다. (그 말을 들으며 뇌세포에서 왠지 모르게 '삐' 하며 약간의 경고음이 울렸지만, 어쨌든 결과물은 훌륭했으니 별다른 코멘트를 달진 않았다.)


한창 예쁠 때 더 예뻐지는 점의 긍정적인 면부터 검토해 본다.

사랑(특히 남녀 간의 사랑)을 하니, 그 '사랑'의 통로를 통해 또 다른 나를 발견한다. 나를 가꾸고 꾸미면서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새로운 나를 만나거나 혹은 숨어 있던 나를 만난다. 그러면서 연인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사랑도 샘솟는다. 여기까진 좋다. 그 '새로 만든(발견한) 나'가 내가 진정 원했던 나와 일치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금상첨화이고 알렐루야이고, 관세음보살, 혹은 축하 화환이라도 보낼 일이다. 그런데 만약 상대가 원하는 그 모습이 나조차도 좀 어색하고 자꾸만 불편하고, 이건 뭔가 아닌데 싶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내게 일어난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다. 친구의 친구를 사랑하는 패륜까지 저지르는 몰상식한 아이들이 열 명에 한두 명쯤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바로 나였다. (이 자리를 빌려 죄송합니다. 지금은 그 친구랑 다시 절친이 되었고, 남자애 얼굴은 기억도 안 나요.) 그런데 그 고등학교 때 나의 남친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적이 있다.


"넌 이름이 좀 남자 이름 같아. 안 예뻐."

한창 예쁠 때 더 예뻐서 더 사랑받아야 하는데 내 이름이 마음에 안 든다고? 나는 당시 '어쩌지, 어쩌지' 싶었던 것 같다. 그때 남친이 해결책을 내어놓았다.

"널 이제 가영이라고 부를게."

응? 나 봄봄(봄책장봄먼지)인데? 가영? 한동안 난 진짜로 그 남친에게 '가영이'로 불렸다. (전국의 '가영 씨' 본의 아니게 죄송합니다.) 게다가 그 녀석은 이렇게도 말했다.

"넌 키가 좀 작아. 난 네가 더 컸으면 좋겠다."

자신은 183cm인데 나와는 키 차이가 너무나도 난다며 생일도 아닌데 갑자기 나에게 높은 굽의 구두를 선물해 주었다. 남친의 선물이라니 무조건 장착해야겠다고 생각한 어수룩한 나는 생전 처음 신어 보는 높은 구두를 신고 독서실을 오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독서실에서 그 구두를 잃어버렸다. 원래 난 덤벙대는 털털한 스타일이다. 사실은 내심, 그 구두를 잃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일부러 키를 늘리고, 억지로 이름을 바꾸고... 이거 지금 보니 약간 가스라이팅 수준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까지 바꿔서 내가 당시 얻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커진 키? 예뻐진 이름? 달라진 외모?



다시 아는 동생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면, 구구절절 그 남친의 말이 한편으로는 맞는 것만 같다. 한창 예쁠 때 짧은 치마나 하이힐, 짙은 화장, 긴 생머리를 장착해야 더 예뻐 보이는 면도 있긴 하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일까 말까 하다, 문득 생각한다.

'예쁨'은 계속 '예쁨'을 더해야만 예쁨을 받는 건가? (예쁨+예쁨= 겁나 예쁨?) 안 예쁜 모습, 혹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면 사랑하기도 사랑받기도 어려운가? 내 아는 동생의 남친에게(이제는 전남친이지만...) 이의제기를 해 본다. 긴 바지와 아무렇게나 틀어 올린 머리, 자다 나온 듯한 부스스한 얼굴, 굽 낮은 운동화 등은 절대 예쁠 수가 없는 것인가. 또 하나 더. 예뻐지자는 약속은 두 사람의 합의된 정당한 약속인가. 나도 예뻐질게, 너도 예뻐져라, 뭐 이렇게라도?


드라마에서 예쁜 사람들이 나오면 그 사랑이 더 몽글몽글해 보이는 점을 나도 부인하지는 않겠다. 한창 어리고 예쁠 때 사랑하거나 결혼하면 후광 효과처럼 더 예뻐 보이기도 한다. 꽃이 피기 전의 기대와 꽃이 피어날 때의 싱그러움. 청춘일 때는 마땅히 청춘을 누려야 할 것이다. 한 번쯤 아주 멋지도록 아름답고 싱그러워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 그 예쁨들이 꼭 맨 앞줄에 선 '싱그러운 나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 본다.



"쌍둥이 키운다고 힘들다더니, 얼굴만 더 좋아졌던데요?"

쌍둥이 할아버지, 곧 나의 아버지가 예쁘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한창' 쌍둥이 육아에 매진하고 계실 때 동네 친구의 부인께서 전하신 말씀이다. 그렇다. 사랑을 하면 정말 예뻐지긴 한다. 그런데 그 사랑에는 남녀 간의 사랑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다. 손주사랑, 조카사랑 같은 가족의 사랑, 나아가 이 세상, 이 지구의, 혹은 이 우주 전체의 사랑도 사랑이다. 사람을, 혹은 동물이나 식물을, 혹은 환경이나 사물 등을 사랑하는 일도 마찬가지. 내 안의 무언가를 아끼고 살피는 일은 '때'를 가리지 않는다. 꼭 '한창'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한창 예쁠 때 계속 예뻐야지, 혹은 한창 예쁠 때 결혼해야지, 이제는 이런 문장에 반기를 들고 싶다. 한창 미운 날들에도 사랑은 찾아올 수 있고 한창 고단하고 어리석은 삶 속에서도 사랑은 다양한 모습과 방식으로 피어날 수 있다.



'한창 예쁠 때'는 누가 정하는 것일까.

웬만하면 그 '때'라는 것을, 이제는 내가 정하고 싶다.



(사진 출처: Clker-Free-Vector-Images,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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