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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Feb 09. 2024

아니, 네가 뭐가 부족해서

웬일로 엄마가 다소 씩씩거리며 들어오신다.

"왜 그래? 무슨 일이셔?"

엄마의 표정만 봐도 몸놀림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아채는 절친(=나)이 묻는다.


"아니, ○○가 글쎄... (어쩌고저쩌고) ..."


사실 엄마는 30년 넘게 이어 온 동네 모임이 있으시다. 앞집, 옆집, 뒷집, 혹은 건너 건너의 집이라는 이유로 정말 오랜 시간 친하게 지내 온 이웃들이 있다.


콩 한 쪽, 아니 콩 반쪽도 나눠 먹었다. 김치도 같이 모여 시끌벅적, 왁자지껄 담근다. 아주머니들끼리 시장에 몰려가서 흥정도 같이 하고 심심할 땐 함께 모여서 잔치판을 벌린다. 콩국수를 말거나 잔치국수를 비비기도 하고, 비가 오는 날엔 김치전을 부치기도 한다. 음식은 일부러 다량으로 준비하여 푸짐한 하루를 함께 보낸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엄마가 집에 없으면 이웃집에 들어가 다짜고짜 "엄마~"를 외쳤다. 어린 나는 이 집 아니면 저 집으로 가서 비슷비슷한 여러 엄마들 사이에서 금세 우리 엄마를 발견해 내곤 했다.


그 인연이, 우리 집이 이사를 한 후에도 여전히 이어졌다. 그런데 그렇게 친하게 지내던 동네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왜 그러시는디유?"

"아니, ○○가 글쎄 결혼을 한다잖아."

응? 안 좋은 일이 아니었다. 외려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평정심의 대가인 우리 엄마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열을 낸다.

"근데 왜?"

"그냥 신경질이 좀 나잖아."

아니, 나이 들어 좋은 인연 만났다는데 그게 왜? 평소 나보고 시집가라는 소리도 일절 안 하시는 분이 오늘은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다.

"좋은 일이구먼, 왜?"

"축하할 일이긴 하지. 그런데..."

('그런데'의 뒷부분에 유심히 귀를 기울인다.)


"너보다 키도 작고.."

응? 여기서 키가 왜 나오지?

"아니 너가 왜..."

엄마의 문장에서 어느새 '주어'는 내가 된다. (엄마의 삶에서 본의 아니게 늘 주어 자리를 차지해 버리는 큰딸내미다.)

"그냥 갈 사람은 가고 안 갈 사람은 안 가는 거지, 뭐."

심드렁하고 태평한 소리나 해대는 나를 두고, 우리 엄마는..


"아니, 네가 뭐가 부족해서."


끝내 우리 엄마는 이 말까지 꺼내 든다. 탄식과 안타까움과 약간의 화가 섞인 문장, '넌 대체 뭐가 부족하기에.'

아, 엄마의 씩씩거림. 그 원산지는 바로 '나'였구나. '너가 왜'라는 말에 붙은 엄마의 숨은 표정을 좀 더 읽어 본다. 그 모임의 자녀들 가운데 이제 나 하나만 남았다. 다들 가는데(어디를 그렇게들 가는지 다 알고는 가는 거겠지?) '너가 왜' 안 가고 있냐는 소리였다. '왜'에 대한 대답을 나도 아직 찾지 못한 터라 나는 엄마에게 그럴듯한 '왜'를 제시하지 못한다.


엄마의 이 말을 출발신호로 하여, 오랜만에 '나의 부족함'을 철저히 탐구해 보았다.


우선 첫 번째 조건 키. 흠... 결혼한다는 언니가 나보다 약간 키가 작긴 하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 이 불필요한 비교야말로 '도토리 키 재기' 아니겠는가. 그래, 어쨌든 나의 '키', 부족하다고 치자. 번째, 직업. 불규칙적인 프리랜서. 아, 이것도 세상의 기준에선 부족할 수 있겠다. 보수가 안정적이진 않다. 번째, 사회성 및 사교성. 그러고 보니 내게 '사'로 시작하는 낱말들은 죄다 없네? 친한 사람들끼리만 친하지, 모르는 사람이 앞에 있으면 입을 꾹 닫는다. 먼저 다가가는 법이 좀체 없다. 번째, 연애 인자. 이건 말해 뭐해, 역시 부족하다. 마지막으로 나이? 오, 나이는 차고 넘친다. 이건 부족하지 않긴 한데 이런 것도 '결혼'의 조건에 끼워 주려나?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닐까?)

아무튼 '아니, 네가 뭐가 부족해서'라는 우리 엄마의 질문에 이제 대답을 할 차례가 왔다.


"음... 엄마, 나.. 그러고 보니 한참 많이 부족해."


‘연소득 6700만 원’…2023년 결혼 조건은? [인포그래픽] - 이투데이 (etoday.co.kr)

이런 뉴스도 있었다. 공식적으로도 한참 부족한 거 맞네요, 엄마. 부족해서 결혼을 하는 면도 분명 있을 것이다. 집이 없고 기반이 없고 낳아서 키우면 교육비도 들고... 결혼해서 안 낳더라도 이쪽저쪽으로 들어갈 데 많고.



그런데 가만...

진정 사람들은 '부족해서' 시집+장가를 안 가는가? 정녕?


'부족'은 '누구누구'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나' 잠재되어 있고, 누구한테나 때때로 생겨난다. 그건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소위 '결혼의 조건'은 될지언정, 내 삶의 조건이나 기준은 아니다. 나의 '부족'이 누군가에게 민폐만 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난 결코 부족하지 않은 셈이다.


결혼에 입성, 혹은 입소하는 과정이 개개인의 '부족 요건'을 점검받는 과정도 아니고, 나의 부족함을 상대를 통해 채우려는 과정도 아니다. 뭐가 부족해서 결혼하려는 게 아니듯, 뭔가가 꽤 부족해서 혼자 살아가려는 것도 아니다.



모임을 다녀오신 후 씩씩거리며 등장한 우리 엄마.

"엄마, 너무 씩씩거리지 마요. 엄마 딸 아직 씩씩해요."


저는 그냥 부족한 나 자신을 사랑해 버린, 아니 부족함을 온전히 받아들이느라 충만해져 버린,

씩씩하디씩씩한 딸이니까요.



오늘도 엄마의 절친, 이 큰딸내미는 엄마의 토라진(?) 등을 토닥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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