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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Jan 26. 2024

폭력적 언사, 둘이 잘해 봐~

-○○ 씨 어때?

-○○ 씨요?

-왜 별론가?

-아, 전 원래 그런 데 관심 없어서요.

-그런 게 어딨노.

-(그런 게 여기 있습니다.)

-둘이 잘해 봐라.

-전 괜찮습니다.



괜찮긴 뭐가 괜찮냐고들 할지 모른다. 진짜 괜찮다고 해도 못 믿는 눈치다. 혼자서 쓸쓸히 살다가 씁쓸하게 죽어갈 것이라 여기나 보다. 그런데 '혼자'면 정말 안 되는 걸까? 왜 세상은 '쓸쓸함'과 같은 비운의 정서를 '혼자'인 사람들과 연결 지으려 하는 걸까. 혼자가 그렇게나 나쁜 걸까?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나를 앉혀 놓고 이렇게 교육하셨다.

"사람, 혼자다. 혼자 사는 거다."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 나는 왠지 모골이 송연해졌다. 자진하여 무릎을 꿇고 앉아 아버지의 인생 조언을 귀담아듣곤 했다.

"혼자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해. 사람은 혼자야. 누구도 대신 결정해 줄 수가 없어."

무언가를 대신 결정해 달라고 떼를 쓴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아버지는 당신 자신이 뒤늦게 결혼을 하신 탓인지 나이 든 부모 밑에서 자라는 어린 딸을 두고 '사람은 혼자서도 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주야장천 강조하셨다. (혼자 살아갈 어린 딸을 걱정하셨던 우리 아버지는 현재 여든이 넘으셨고 늙은 딸과 투덕거리며 잘만 살고 계시다.) 아무튼 나는 어른도 되기 전에 굳세게 깨달았다.


아, 그래! 사람은 혼자구나!


혼자가 당연했고 혼자가 편했다. 옆구리가 허전하다는 느낌보다는 옆구리가 여유로워 내 보폭도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쭉 혼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진하게 좋아한 적도 있고 상대가 질릴 정도로 600여 통이 넘는 편지를 보낸 적도 있다. 그게 다 사랑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래도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나 하나쯤 희생하는 일에 꽤나 너그러웠던 나다. 하지만 마음 밑바닥 깊숙한 곳에서는 항상 '사람은 혼자다' 혹은 '혼자여도 괜찮다'는 무의식이 찰랑거렸던 것 같다.



"이 스피치 강의 끝나고 혹시라도 기차 놓치면 ○○ 집에 가서 하룻밤 신세를 져야 할지도 모르겠네. 봄봄(=나)도 같이 갈려?"

갑자기 우리말 강사라는 직업에 덜컥 도전장을 내밀었던 당시의 나는 강사로서 부족한 점투성이었다. 언변이 초라하디초라하여 화술을 제대로 익히고 싶었던 나는 스피치의 문을 두드렸다. 거기서 만난 스피치 대표님은 상당히 인간적인 분이셨고 사실 지금도 내가 존경하는 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표님과 마주한 장면들 가운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마는 장면들이 개쯤은 있다.


"둘이 잘해 보지 그래? 직업도 괜찮고, 돈도 잘 번대."

(괜찮은 직업으로 돈까지 잘 번다는 상대 남자 수강생을 바로 앞에다 두고 하시는 말씀이었다.)

"아하항. (괜찮대도요.)"

"봄봄(=나)이랑 나랑 ○○ 씨네 같이 놀러 가 볼까?"

"아, 아니요 .... "


말줄임표에 담긴 침묵을 긍정이라 잘못 해석하셨는지 강의가 거듭되어도 스피치 대표님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으신다. 물론 속으로는 '아니요'를 수도 없이 외쳤지만 상대 남성을 앞에 두고 "저 사람 스타일 아니라니까욧! 아 진짜 왜 그러셔요!!?" 이렇게 대놓고 말하기도 실은 어렵다. 내 외양도 별반 다르지 않으니 남 탓할 처지는 아니다.

문득 상대 남자 수강생을 쳐다보니, 저자도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 수강생의 '아는 누나들'이 나이 든 여자(=나)가 수강생으로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눈에 불을 켜고 스피치 대표님을 푸시하고 있다는 소문이 내게도 들린다. 그러나 나도 그도 별 반응이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1밀리그램의 호감도 1퍼센트의 관심도 없는데, 이 두 사람은 가만히 앉아 있다가 '둘이 잘해 보라'는 봉변을 당하고야 만다.


몽둥이를 들고 쫓아오는 것만이 봉변이 아니다. 난감한 질문에 더해 긍정의 대답까지 강요하는 것은 분명 불편한 봉변이다. 강의 도중 갑자기 수업과 관련 없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위 '노처녀', '노총각'이라는 자들을 대화의 접시에 올려놓는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느냐고 묻기도 하고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둘이 잘해 보는 수밖에 없다고 자기들끼리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당사자를 제삼자로 밀쳐 두고 나누는 이야기들이 썩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꽤 폭력적이었다. 강사님은 계속해서 둘이 잘해 보라고 하지만 남자도 여자도 서로 기분만 나쁘다. 심지어 강사님은 따로 카톡을 하여 그 사람이 '진짜 별로냐'고도 묻는다. (몇 번을 말합니까요.)



'잘되면 술이 석 잔이고 잘못되면 뺨이 석 대'라 했다. 술을 드시고 싶으셨는지 어쩐지는 모르겠다. 다만 '둘이 잘해 봐'라는 문장을 후드득 얻어맞고 나니, 술 석 잔을 먹은 듯 얼굴이 빨개지고 석 대 이상 뺨을 맞은 듯 얼얼해진 쪽은 되레 내 쪽이다. 아마 상대 남성도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둘이 잘해 봐."

5년 전에는 내공과 순발력이 부족했기에 제대로 답변을 못 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누군가 내게 이런 폭탄을 던져 온다면?



둘 말고 <혼자> 잘해 볼게요.


세상에는 둘이 잘해 보는 사람도 셋이 잘해 보는 사람도,

그리고 '혼자서' 잘해 보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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