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몽글몽글한 합격의 영광에 잠겨 있을 때, 난데없이 우리 식구들이 내게 다가오더니 슬며시 쯧쯧거린다.
“근데 너, 머리 좀 봐. 이러고 직장 다닐 거야?”
거울을 들여다보니 유난히 오늘따라 내 머리털이 ‘개털’이다. 안 되겠다. 미용실이란 데를 가 봐야겠다. (나는 평소 미용실을 잘 안 간다. 어찌 ‘여자’가 그럴 수 있느냐고 양성 차별적 발언은 마시라. 난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여자다.)
“언제 머리 하셨어요?”
“아하하. 기억이 안 나요. 한 1년 넘은 것 같은데.”
나는 청학동 도령의 머리 길이만큼이나 길어 버린 내 머리를 바라본다. 면접을 다니면서도 하나로 질끈 묶으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좀 달라져야만 할 것 같다. 직장을 다니기로 했으니 돈도 좀 써도 될 것 같고, 빚도 좀 져도 될 것 같다.
나는 난생처음으로 미용실 가격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머리 좀 하러 왔습니다,라고 미용실 문을 세차게 연다. 실제 가격을 완전히 모르는 채 무언가를 구입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지금 두근댄다. 커트도 하고 염색도 하고 파마도 하고 영양도 좀 줘 볼까? 나는 지금 나의 미(美)를 구입하고 내 미래를 구입하려는 중이다. 가격을 모르고 지불하는 ‘미래’의 대가는 대체 어느 정도일까?
“21만 원입니다.”
머리 작업이 들어가기 전 내게 미리 알려 준 아름다움의 가격. 처음 시작하는 숫자가 ‘2’여서 꽤 꽤 움찔한다. 그러나 미용실 의자 안에서 이렇게 마음이 편해 보긴 실로 오랜만이다. 한참을 졸았고, 편안히 ‘멍’을 때렸다. ‘21만 원’이 아니라 ‘21만 원 할아버지’라도 다 내어 줄 성싶다. 자다 깨어 슬금슬금 정신을 차리고 거울을 본다. ‘하아아아. 이, 이건…….’
“다 되셨어요. 마음에 드세요?”
뭐라 말해야 할까. 내가 이렇게도 생겼었나? 빗자루 털 같던 내 머리칼들을 살짝 C컬로 말고, 머리끝도 날래고 가벼운 느낌으로 손질도 했다.
“모양도 색깔도 참……. 예쁘게 잘 나왔네요.”
차마 내 얼굴이 정말 예뻐 보인다는 말까지는 내 입으로 내뱉지 못하겠다마는, 갑자기 나는 ‘어찌 된 일인지 좀 예쁘다.’ 불과 몇 시간 만에 ‘과거의 내’가 싸악 사라지고, 찬란한 미래 속으로 걸어 들어갈 ‘현재의 나’만 남은 것 같다.
“다행이네요.”
나의 피 같은 21만 원을 할부로 긁어간 미용실 원장님이 다행이라며 방긋 웃는다. 그리고 내 겉옷을 내주다 말고 내 뒤통수에 대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말만은 꼭 해 줘야겠다고 굳게 결심이라도 한 듯이.
“손님!”
“네?”
“손님, 근데 평소에 머리는 잘 안 빗으시죠?”
“아…….”
“손님, 빗질 좀 하셔야겠어요.”
아하하. 나도 모르게 또 바보처럼 웃는다. 미용실 원장님은, 머리 빗으면 안 엉키거든요, 라며 따끔한 조언을 내게 덧댄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따갑고 예뻐진 뒤통수로 미용실 문을 재빨리 나선다.
평소에 머리 빗으면 안 엉키거든요.
집에 오는 길, 이 단순하고도 자명한 진리를 다시 한번 되뇌어 본다.
‘아, 평소에 빗으면 안 엉키는구나.’
그동안 이리 엉키고 저리 엉키던 내 머리는, 아니 내 인생은
제 갈피를 못 잡은 채 늘 ‘산발’이었다. 이제 산발이던 내 인생 머리를 정돈해야 할 때가 왔다. 앞으로 돈도 벌고 어엿한 사회인도 될 테니, 인생 빗질, 새롭게 ‘정성 들여’ 차근차근 시작해 봐야겠다. 그러려면,
우선 빗부터 사자.
지갑이 빈 채로 카드만 하나 달랑 들고, 어느 예비 직장인 하나가 미용실 문을 나선다. 마트로 향하는 그녀의 걸음걸이가 어쩐지 경쾌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