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핟... 숨차다고, 같이 좀 가자니까."
"아니 인간들은 왜 이렇게 굼떠?나처럼 이렇게 뛰는 게 정말 안 되나?"
위로봇이 여든 먹은 나를 한심하게 내려다본다.
"너도 나처럼 늙어 봐라."
"나 늙어 봤는데?"
"뭐?"
"내 부품 하나를 검색해 봤더니 팔십 년이 넘은 게 있더라?그러니까 내가 여든보다 늙었을 수도 있단 얘기지."
아이고, 저걸. 말이나 못하면..
"자, 여든! 다시 힘내서 뛰어 보자고."
"이 나이에 무리해서 뛰면 큰일 난다니까?"
"뛰어 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알아?천천히라도 좀 움직여 봐. 암튼 나 먼저 한 바퀴 더 돈다?"
너는 지금 바퀴로 굴러가니 그렇지, 내 이 두 다리에도 바퀴가 달렸다면 너 같은 낡은 로봇쯤은 너끈히 제쳤다고.
숨이 차올라 사레까지 들린다. 내뱉으려던 말은 발화되지 않고 빈약한 폐활량 속으로 거품처럼 사라진다.
"그러게 평소에 운동 좀 하라니까."
나를 뒤돌아보며 기어이 한마디를 더 보탠다. 숨쉬기 운동도 힘든 나한테 잔소리는..
"자, 한잔해."
위로봇이 언제 챙겨 왔는지 물병과 바나나맛 우유를 하나 내민다. (지난주 내가 섭섭해했더니 어디선가 사 온 모양이다.) 두 바퀴를 겨우 뛰고 앉아 숨을 돌린다. 마흔에도 해 보지 않은 달리기를 여든이 되어 시작하다니...
"근데, 위로. 넌 왜 뛰어?"
"멍에는 달리기멍이 최고거든."
"멍은 또 뭐고 달리기멍은 또 뭐야?"
"여든이 젊었을 때 한창 유행하던 말이라는데 '멍 때린다' 몰라?"
"아, 그 멍?근데 멍은 물멍, 불멍, 뭐 이런 자연 속에서 때려야 하는 게 멍 아니야?"
"나도 그런 줄 알았지."
"근데?"
달리다 보니까 물빛 같은 저 푸른 하늘도 보이고 달리다 보니까 불타는 듯한 태양도 보이고, 그렇게 계속해서 달리고 달리다 보니까... 정말... 아~~ 무것도 안 보이더라.
"엥? 그게 뭐야? 그게 네가 말하는 '달리기멍'이야?"
"달리기를 하면 어느 순간 '달리기만' 하게 되더라고. 뭐, 물론 나는 다리가 바퀴로 되어 있어서 이걸 달린다고 해야 할지 구른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근데 뭐, 달리기가 꼭 두 다리가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 아무튼 '그냥 달린다'의 느낌이 난 좋더라. 그게 '달리기멍' 아니고 뭐겠어?"
"그냥 달린다?"
"응."
"아무것도 안 보이는 마음으로?"
"응."
"아무 생각이 안 들면 좋은 건가?"
"그럼~ 그저 다리가 시키는 대로 뇌도 달리기에만 집중하는 거지. 달리다가 겨우 드는 생각이 딱 하나 있다면..."
"그게 뭔데?"
"여기서 더 달려, 말어?"
위로는 바퀴로 된 자신의 다리를 탕탕 두드리며 다시 말을 잇는다.
"살면서 머리가 터질 것 같을 땐, 아무리 여든이라도 가끔은 달려 봐."
"달리면?"
"여기서 더 달릴까, 아니면 여기서 그만 멈출까. 그거 하나만 생각하면서 달리고, 그거 하나만 생각하면서 살라고."
"선택의 순간이 올 때마다?"
"응. 그래야 멍이 덜 들어."
"멍?"
"응. 이번엔 보라색 멍. 심장 안쪽에, 우리 마음 깊숙한 곳 안쪽에 우리가 몰래 숨겨 둔 그 보라색 '멍'들 말이야."
"보라색?"
"때로는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그 보라색 멍들이 조금씩 옅어질걸?"
"그 멍들이 보라색이야?"
"음.. 아마도? 걱정, 우울, 불안, 절망, 좌절의 색깔. 혹은 우리 상상 속 미래의 빛깔일 수도."
우리 마음에 자꾸만 들어오려는 보라색 멍들은 달리기멍으로 치료해야 한단다.
오늘따라 위로의 말이 알쏭달쏭하다. 약은 약사에게, 멍은 멍에게, 뭐 이런 걸까?
"여든, 한 바퀴 더 콜?"
콜 같은 소리 하네, 라고 말하려다가 여든 살만큼의 멍은 얼마나 '슈퍼울트라 보랏빛'일까 싶다. 아무래도 여든에겐 '달리기멍'이 더 필요할 것 같다.
"콜!"
딱 한 바퀴만 더 뛰자.
달리는 동안만큼은 내 안의 멍들도 보랏빛을 잠시 멈출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