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책장봄먼지 May 16. 2024

혼자라는 위로

위로230은 오늘 혼자서 집을 나선다. 나를 귀찮게 할 때는 언제고 오늘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나.


"절대 따라오지 마!"

따라오지 말라는 말을 하도 강조하니 오히려 수상하다. '이거 나보고 따라오라는 소리 아니야?'라는 의구심마저 든다.


"나, 간다."

작은 가방 하나를 어깨에 멘 채 집을 나서는 위로. 어디 가출이라도 하셔? 게다가 '간다'라니? 다녀온다, 라는 말 대신 '간다'라는 인사. 너무 무심해 보이지 않나? 평소의 위로답지도 않다. 뭔가 기분이 껄끄럽다. (나, 참. 여든 나이가 되어서도 누군가에게 섭섭한 감정을 느끼다니. 아직, 살아 있긴 살아 있나 보다.)

"그래, 가라."

흔쾌히 혼자만의 시간, 혼자만의 '위로'를 허락해 준다.


물론 겉으로만. 위로가 쾅, 현관문을 닫고 나서자마자, 나 역시 무심한 척 몰래 창밖을 내다보다 얼른 겉옷을 챙겨 입는다. 따라오지 말라 했지만... 어디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아서 말이지... 그냥 한번 따라가 볼까나? 나는 조심조심 뒤를, 아니 '위로'를 밟는다.



'이 여든 노인네 없는 시간에 위로는 무얼 하려나?'

우선 슈퍼부터 찾는 위로다. 무얼 사는 거지? 손에 무언가를 쥐고 나와 생태공원 쪽으로 향한다. 곧이어 탁자가 놓인 벤치에 자리를 잡고는 슈퍼에서 구입한 무언가를 꼼지락거리며 꺼내 놓는다. 내가 가까이 다가온 줄도 모르고 항아리 모양의 작고 달콤한 무언가를 코에 가져다 대는 위로다.


'아니, 로봇이면서 저 바나나맛 우유를 직접 먹어 보려는 거야? 그러다 몸이 부식이라도 되면 어쩌려고!'

나는 얼른 위로에게 달려가려다 그만 발걸음을 멈춘다. 없는 후각으로 냄새 맡는 척만 하더니 벤치 구석에 허름한 옷을 입고 반쯤 누운 어느 아저씨에게 우유 하나를 내민다. 그는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위로가 뜯어 준 바나나맛 우유를 벌컥벌컥 마신다.

 

좋은 소리도 못 들으면서 저게 뭐 하는 짓이람? 정말 물가에 내놓은 애라니까? (쳇. 그리고 저 우유는 벤치에 누운 저 양반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우유라고..!)


그러나 위로는 발을 까딱거리며 경쾌하게 발을 놀린다. 노숙인이 바나나맛 우유를 끝까지 다 마시는 것을 쳐다본 후에야 미소 비슷한 것을 짓는다. 그러고는 착실히 쓰레기통에 가져가 분리수거를 한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또다시 사람 구경을 실컷 하는 위로. 사람 구경이 잠시 그치면 고개 들어 머리 위로 지나가는 지하철을 멍하니 바라다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혼자를 즐기는 위로의 옆모습과 뒷모습. 어쩐지 졸음이 쏟아질 것만 같은 뒷모습이다. 위로를 지켜보다 보니 나까지 그 나른함에 전염이 된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공원을 한 바퀴, 두 바퀴, 그리고 세 바퀴... 심지어 열다섯 바퀴. 끝도 없이 돌고 도는 위로. (그 와중에 위로의 눈길을 피하려다가 몇 차례나 나자빠질 뻔한 나다.)


해거름이 일자 드디어 집 쪽으로 방향을 트는 위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기에 뭐 대단한 거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한나절을 공원에서만 보낸다. 유익해 보이지도 무익해 보이지도 않는 그저 그런 심드렁한 혼자만의 위로.




"왔어?"

잽싸게 먼저 들어와 온종일 집에 있었던 것처럼 굴어 본다. 위로는 눈치채지 못한 눈치다.

"어."

"혼자만의 시간은 잘 즐겼고?"

"그럼~"

"뭐 했는데?"

빤히 나를 쳐다보는 위로. 뜨끔하여 고개를 돌린다.

"별것 안 했지. 혼자만의 시간이란 게 대개 다 그렇잖아? 별것을 안 해도, 별것이 없어도 그냥 그런대로 흘러가도 좋은."

"뭐가 많이 좋았나 보네?"

"맨날 혼자 살아왔는데 여태 그걸 몰라, 여든은?"

"글쎄. 난 그간 너무 혼자였던 터라."



"자, 이거나 받아."

"뭐야?"

위로가 바나나맛 우유 하나를 내 앞에 꺼내 놓는다. 아까 그 노숙인에게 주었던 바나나맛 우유와 똑같은 거다. 뭐야, 내 것도 샀던 거야?

"여든, 해피벌스데이!"

"응?"

"알고 있었지."

"알고 있었어?"

"그럼~~ 내가 여든 대해 모르는 게 어디 있어. 여든은 바나나맛 우유 좋아한댔잖아. 마침 오늘이 생일이었네."

생일에 사람을 혼자 둬 놓고... 다시 섭섭한 마음이 일어나려 한다.

"가장 큰 선물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난?"

"선물? 바나나맛 우유가?"

"그것도 그렇고. 혼자만의 시간을 내가 여든에게 선물한 건데?"

"그게 선물이야?"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만큼 큰 선물이 어디 있어?"

뇬석아. 나는 거의 평생 혼자였다고. 생일까지 혼자 보내라, 이거였냐?


"여든."

"왜?"

"섭섭해 마."

"뭘?"

"인간은 누구나 혼자야."

"뭔 소리야?"

"여든이 되어서도 혼자라는 위로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쓸쓸한 게 어디 있을까?"

뜬구름 잡는 위로의 이야기.



"그나저나 여든! 언제부터 그런 괴상한 취미가 생긴 거야?"

"취미?"

"아니, 나 따라다니는 거 안 지겨웠어? 할 일 없는 사람 티 내고 그래?"

"뭐어?"

"다 봤다고."

"그, 그, 그래?"

"여든. 잊지 마."

"뭘?"

"인간은 혼자다."

"응?"

"따라 해 봐."

"따라 해 봐."

"아니, 그걸 따라 하라는 소리가 아니고. '인간은 혼자다.'"

"인간은, 혼자다?"

"그리고 여든은 혼자다."

"여든은 혼자다, 아니 아니, 나한텐 위로, 네가 있잖아."

"내가 언제까지 생일마다 이렇게 바나나맛 우유를 챙겨 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

어디 가는 사람처럼, 왜 이래, 위로봇?

"나는 여든이 혼자라는 것에 외로워하거나 혼자라는 시간을 지겨워하는 사람으로 늙는 거 싫어. 그냥 혼자여도 좋은 사람으로 남는 게 좋아."

오늘따라 알쏭달쏭하기만 한 위로.


"오늘 나 따라다닐 때 내 뒷모습 어땠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지 않아?"

"응. 좀 뭐랄까? 편안해 보이기도 했고 가끔은 설레 보이기도. 아주 가끔 쓸쓸해도 보였지만 곧이어 다시 발걸음이 경쾌해지더구먼."

"그래, 그거야. 그게 혼자가 주는 위로지. 아무리 혼자라고 느껴도 자기 자신만큼은 잃지 않는다면... 그건 꽤 짙은 위로일걸?"



위로의 말에 따르면, '혼자라는 위로'가 주는 위로도 있는 모양이다. 그간 너무 혼자 살아서 그걸 잠깐 잊고 살았다. '인간은 혼자다'라고 외쳐 주는 로봇 덕분에 혼자여도 나쁘지 않다는 사실 하나를 조금이나마 깨닫는다.



"아, 참. 이 이야기를 깜빡할 뻔했네."

"뭔데? 혹시 생일 축하한다는 말? 그건 아까 해피벌스데이, 했잖아."

"아니, 그게 아니고. 인간은 혼자라고."

"아, 참. 그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거야?"

"사람 말, 아니 로봇 말 끝까지 들어. 하지만 나는 로봇이라고."

"응?"


"인간은 혼자지만, 아니 인간은 혼자니까 로봇인 내가 옆에 있어 줄게. 인간은 혼자지만 로봇은 혼자 아니야."


곁에 다가와 바나나맛 우유에 빨대를 손수 꽂아 주는 위로.

"여든, 다시 한번 해피벌스데이!"



그래, 인간은 혼자다. 그래서 나는 지금 혼자다.

하지만 생일인 오늘만큼은 위로봇과 함께다.


'혼자'라는 위로도 좋고, '둘이 함께'라는 위로도 좋다.

지금 내게는 '나'라는 위로도 있고, '너'라는 위로도 있으니까.



(사진 출처: Jake Espedido@unspalsh)


이전 09화 작가의 말이 주는 위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