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는 요즘 책의 앞부분과 뒷부분만 읽는다.아주 오래전 내가 사다 쟁여 놓은 먼지 쌓인 책들이다. (솔직히 저게 책을 제대로 읽는 방식인지는잘 모르겠다. 그래, 딱 그 속담이 떠오른다. 수박 겉핥기! 꿀단지 겉핥기!)
"난 대강 앞과 뒤만 보면 책이 어떻게 전개될지 다 알겠더라고."
"진짜?소설인데도?"
"응. 내가 기억력은 많이 잃었지만 추리력과 상상력은 아직 많이 남아 있는 듯함.내가 봐도 좀 놀라울 정도?"
저 자신감은 대체 매번 어디서 재생산되는 건지... 근데 로봇의 상상력이라... 인간의 상상력으로 탄생한 녀석인데 자기가 상상력이 뛰어나다고 말하다니. 로봇이 상상력이 많아지면 그거 인간한테 좋은 건가, 어쩐 건가?
"근데 위로, 왜 그렇게 처음과 끝부분만 열심히 읽어?"
"앞부분엔 '작가 소개'가, 뒷부분엔 '작가의 말'이 나와 있잖아."
"난 그거 그냥 건너뛰며 읽었는데. 뭐 요즘은 글씨가 워낙 작아 보여서 책도 잘 안 보지만."
"그 부분이 진짜 백미야. 진수 가운데 진수."
"그런 말도 알아?"
"응. 나 이래 봬도 로봇이라고, 문학로봇."
자기가 문학소년이라고 우쭐대는 위로다.
"난 근데 드라마를 봐도 메이킹 필름, 이런 거 보면 몰입이 더 깨지더라. 작가의 말도 마찬가지. 작품은 그냥 작품대로 놔두는 게 좋아. 내 해석으로만 남겨 두고 싶어. 작가가 그걸 왜 지었는지 알게 되면, 좀 흥미가 떨어진다고나 할까."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이것들 좀 봐. 작가의 말에는 뭔가 다른 세상이 있어. 작가 소개 글도 마찬가지고."
"뭔데?"
"먼저 이 책. '유진과 유진'부터 소개해 볼까?"
"작가님 딸에게 유진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작가님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작가는 그 자리에서는 당장 밝히지는못했지만 여기 봐. 작가의 말에서는밝히고 있어. 자기 딸도 그런 추행을 당했다고. 그리고 지금 그 딸아이는 그 일을 '놀다가 넘어진 것'만큼도 기억을 안 한다고. 딸이 그랬대. 그 사실을 많은 사람에게 알려 주라고.
작가는 이렇게도 말해.
"또 다른 유진과 유진아. 네가 겪은 그 일은 네 잘못이 아니야.네게 무슨 일이 있었든 너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야."
같은 일을 겪은 이들이 이 책을 본다면 이 작가의 말덕분에더 진하고 깊은 위로를 받게 되지 않을까?
비슷한 이야기로는 이 책도 있어. 이 작가는 직접 자기 고백을 해. 자기가 당사자였다고.
우리 모두가 자신을 지키는 늑대가 되자고 끝을 맺어.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큰 용기가 될 것 같아.
(위로, 네 말대로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두 번째 책은, '구미호 식당' 시리즈.
"그 시간을 너무 쉽게 흘려보내는 건 아닌지, 내일이 있을 거라고, 모레가 있을 거라고 너무 단단히 믿고 있는 거는 아닌지."
이 작가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다뤄. 장장 4권에 걸친 시리즈야. 이분이 왜 이렇게 이쪽 주제에 정성을 쏟았나 했더니 여러 사연이 있었어. 왜 진작 말을 걸지 못했나, 관찰만 하고 있었나. 왜 그 친구를 그냥 보냈나. 그리고 3권 《약속식당》에는 더 깊은 사정이 나와. 작가 본인의 혈육에 관한 이야기. 작가가 소설을 쓰면서죽음과 삶 사이에 사다리를 놓는 이유가 3권 '약속 식당'의 작가의 말에도 나와 있어. 나중에 한번 봐 봐.
(위로, 언제 이런 걸 다 생각한 거야? 나 놀라려고 그래~!)
세 번째 책은, '나는 초콜릿의 달콤함을 모릅니다'
이 책은 초콜릿을 생산하는 노예 아동에 관한 이야기로 작가의 말을 시작해. 이런 사회 현실에 관해 궁금하다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작가는 작가의 말 부분에 자기 개인 홈페이지 주소까지 남겼어. 독자가 자기 책을 읽고 함께 변화하길 원하는 거지. 조금씩 같이 행동하기만 해도 세상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그건 세상을 향한 올바른 위로가 될 수 있을 거야.
(위로, 네가 언제 이렇게 다 큰 거지??)
네 번째 책은, 위트와 상상력이 대단한 책, '너만 모르는 엔딩'
"올가을엔 몇 년 부은 적금 통장을 깨서 영국 스톤헨지에 다녀왔다. 주변에는 거창한 핑계를 대고 떠났지만 사실은 그 일대가 UFO 출몰 지역으로, 미스터리 서클 발견지로 유명해서였다. 결국 이렇다 할 증거는 찾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목격자들은 만나 보았다. 스톤헨지 주변의 양떼였다. 놈들은 다 알면서도 풀을 뜯고 있었다. 양들의 침묵....."
한참을 웃었어. 그런데 웃다가 생각했지. 진짜 UFO가 있지 않을까!? 이 정도로 설득적인 작가의 말이라면 한 번쯤 믿어 봐도 좋을 것 같아. 특히 이 부분이 따듯하고도 재밌더라.
"최근 눈여겨보고 있는 상대는 사계절출판사의 ㄱㅌㅎ 팀장님이다. 팀장님은 작년보다 몇 곱절로 바빠 보였고,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맛있는 초코케이크에 포크 한 번 대 보지 않고 그냥 갔다. 어느 시점엔가 외계인이 ㄱㅌㅎ 팀장님과 몸을 바꿔치기한 건 아닐까. 살짝 의심이 간다. 원고를 열심히 봐 주셨으니, 외계인이라 해도 감사할 따름이다."
"이 작품집을 지구에 잠입한 외계인과 대한민국 청소년, 그리고 예쁜 별이 되신 ㅎㄴㅇ 선생님과 ㄱㅇㄱ 선생님께 바친다."
뻔하게 누구누구한테 감사해요, 이런 작가의 말이 아니야. 눈여겨보고 있다는 '따뜻한 관심'의 표현, 그리고 원고를 보아 준 것에 관한 깊은 감사의 마음이 재치 있게 드러나고 있어. 작가는 이것을 본인만의 B급 유머라고 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건 A급, 아니 로봇도 감동할 만한 천상급의 감사와 찬사야. 이런 작가의 말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 뭔가 찡하더라고. (웃으면서 동시에 찡할 수 있는 거 그거 진짜 어렵잖아.)
그리고 다음은 작가 소개 글들.
"되고 싶은 게 없어서 꼭 살아야 하나 고민하던 청소년 시기를 지나,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오래 살고 싶은 어른이 되었다."
"동식물이 주류가 되고 인간이 비주류가 되는 지구를 꿈꾼다."
"작가의 말이나 작가 소개 부분을 읽으면 작가가 꿈꾸는 세상들이 궁금해져. 궁금하다는 게 그렇게 달콤한 위로가 될 줄은... 위로봇인 나조차도 몰랐지. 다 책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열심히 본 덕분이야!"
"이야. 위로, 너 사람 다 됐다?"
"그런 말 하지 마."
"왜? 사람 싫어?"
"아니. 궁금은 해. 다음 생에서는, 아니 나 같은 로봇에게도 그런 게 있다면 한 번은, 인간으로도 살아 보고 싶기도 하고."
"그런데?"
"하지만 난 지금 여기, 이 로봇 그대로가 좋아."
"그..래?"
"뭐, 나의 이 고철 이음새 부분들이 가끔 삐거덕하긴 하지만... 여든 네 옆에 있는 지금 이 로봇의 시간이, 뭐 그리 나쁘지는 않아."
"로봇의 시간이라....."
"아니,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참... 좋아..!"
위로의 말을 듣다 보니 '작가 소개 글'이랑 '작가의 말'... 이건 인간 삶의 처음과끝이 아닐까 싶다. 책의 가운데 부분까지 꽉꽉 채워 쓰진 못하더라도 살면서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 알려 주는 '작가 소개 글'과 내가 어떻게 살아왔다고 말해 주는 '작가의 말' 정도는 써 봐도 나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