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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Apr 18. 2024

전지적 위로 시점의 위로

"아니, 가 보 라니까?"

"아, 괜찮대두.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지금 눈이 아주 세게 충혈됐다고. 나랑 같이 가, 그럼."

"됐다니까.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알아서 한다는 게 그 모양이냐는 말이 입 밖으로, 정확히는 내 고철 밖으로 새어 나올 뻔하였지만 꾹 참았다. 로봇조차도 참을성을 기르게 만드는 여든. 여든은 대체 뭐가 저리 자신만만한가. 아니, 여덟도 아니고 여든 아니던가. 근데 저 건강에 관한 자신감은 대체 뭐지?



"위로, 잘 잤어?"

이틀 후, 아침 인사를 나누다 말고, 문득 여든에게서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다.

"헉. 여든, 잠깐. 이리 와 봐. 뭐야, 뭐야? 그 눈팅이 밤팅이는?"

"뭐가?"

"거울 봤어?"

"내가 일어나자마자 누구한테 잘 보일 일도 없는데 무슨 거울을 봤겠어."

"눈곱이 실가닥 같이 여든의 눈썹 위에 덜렁덜렁 붙어 있어! 눈알은 뻘게 가지고. 내가 그럴 줄 알았다고! 내가 병원 가 보자 했잖아."

눈이 꽤 무거웠을 텐데 저리 둔하다니. 여든은 자기 나이만큼이나 자기 생(生)에도, 자기 몸에도 둔감한 편이다.

"그, 그래?"

거울 앞에 가서 자기 모습을 마주하고서야 '앗 뜨거' 하는 표정이다.


내가 그제 밤부터 그렇게 잔소리를 했는데도 이 위로의 잔소리를 콧등으로도 안 듣더니 결국 사달이 났다. 저건, 유행성 결막염이 분명하다. 쉽게 말해 눈병. 어이구 어이구, 잘~ 헌다.

"내가 진즉 안과 가 보랬잖아?"

"그, 그렇게 티 나나? 이렇게 안경을 쓰면... 좀 괜찮지 않아? 감..쪽같..지?"

그건 여든의 희망사항이고.

"아니, 병 고칠 생각을 해야지, 위장술 쓸 생각부터 해?"

"아니, 이따 또 장례식 가야 해서."

"또?"

"응."

"그건 그거고 치료는 받아야지. 그리고 장례식장에 눈병 옮기려고 그래?"

"아니, 안과도 안 갔는데 눈병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는 거지!"

여든은 애써 현실 부정 중.

"'눈병'에 일주일 설거지 건다."

나는 손모가지를 거는 심정으로 비장한 표정을 짓는다. 요즘 여든이 동안인 에게 은근슬쩍 집안일을 미룬다. 내가 자기 가사봇인 줄 아나!

"일주일이나? 쳇. 좋아. 일주일에 일주일 더 얹어서 보름 동안 설거지에다 청소기까지 돌리기!"

"콜!"

"콜!"



"어떻게 오셨어요?"

여든의 말을 가로채기하여 위로인 내가 대답한다.

"아, 네. 저 여든이라는 양반 꼴을 보니 딱 눈병 같아서요. 의사 선생님 눈병 맞죠, 맞죠?"

"봐야 알죠."

"위로. 진정해. 봐야 아신다잖아."

"환자분, 언제부터 그랬어요?"

여든의 말, 2차 가로채기. 위로인 내가 대답한다.

"아, 그제 밤부터 수상하긴 했어요. 그때부터 바로 가자니까 더럽게도 말을 안 들어서. 아시잖아요. 여든이면 남의 말 안 들을 때라는 거. 제3, 제4의 사춘기죠. 근데 이거 눈병 맞죠, 선생님?"

"눈병은 아니죠, 선생님?"

끼어드는 여든이다.

"저기, 두 분 다 조금 조용히 해 주시고요."

"아, 네."

"아, 네."

나와 여든은 심각하게 눈을 관찰하는 의사 선생님 앞에서 배꼽인사 같은 포즈가 된다.


"결막염이네요. 전염돼요, 이거. 1~2주 안약 넣어 보시는데, 1주 후에도 상태가 호전 안 되면 다시 오시고요. 한 1~2주는 지나야 될 거예요."

랩하듯 매우 빠른 속도로 말씀하시는 의사 선생님이다. 



병실을 나와서는 여든의 표정이 밝다. 왜지?

"위로, 봐 봐. 내 말이 맞잖아. 결막염이라 그렇다잖아. 걱정할 필요 없었네. 1~2 주 약 먹으면 된다잖아."

응? 무슨 소리. 저기요, 여든 씨. 같이 들어 놓고 무슨 딴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지금?


<여든의 '가는귀'가 들은 내용>
1. 결막염, 단순염증.
2. 1~2주 알약 먹기.
3. 잘하면 1주 내 완쾌.

<위로봇이 들은 내용>
1. 유행성. 전염 가능 결막염.
2. 1~2주 안약 넣기.
3. 2주를 넘겨야 쾌차.


자기식대로 해석하고 싶은 여든에게 든다. 가서 안약이나 넣어 주고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는 내가 설거지, 청소기 다 해 줘야지, 뭐. 한 살이라도 더 어려 보이는 내가 그냥 져 주기로 한다.


"위로, 근데 나는 복 받았나 봐."

"그걸 인제 알았어?"

"병원동행 서비스, 그런 거 신청 안 했는데도 이런 로봇이 내 옆에 있으니 말이야. 편리하긴 하구먼?"


안과에 다녀오는 길, 여든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 보인다. 여든 나이가 여든이다 보니 위로가 꽤 자주 필요했나 보다. 앞으로도 잔소리가 담긴 위로 모습을 자주 보여줘야겠는걸! 근데 가만. 혹시 '내 몸은 내가 잘 안다'고 큰소리쳤던 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혹 걱정이나 조금의 두려움이었으려나.. 저렇게 개운해하는 걸 보니 병원에 데려가길 잘한 것 같다.





<보름 후의 '위로' 일기>


"위로, 눈이 자꾸 희끄무레하네. 예전 같지 않아. 섬광 같이 무언가 번쩍 할 때도 있고."

"안과 다시 가서 제대로 검사받아 보자니까. 백내장 수술도 할 수 있으면 하고."

"어이쿠. 백내장 한쪽에 150만 원짜리도 있다는데 그걸 어떻게... 두 군데 하면 300만 원이야."

"보험이 되는 건 한쪽에 25만 원씩이래. 걱정 말고 가 보자고."

"위로. 난 그냥 이대로 살래."

"뭔 소리야, 점점 잘 안 보인다면서?"

"흐릿하게 보이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응?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유?"

"보아야 할 것만 보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 말라는 이유. 모든 것을 다 볼 필요는 없다는 거지. 그게 세상의 이치 아니겠어?"

"(그게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야??) 잘 안 보이면 가서 치료를 받아서 나을 생각부터 해야지. 뒤로 꽁무니 빼고 달아날 생각부터 해?"

"위로 너 같은 심부름꾼이 옆에 있는데 뭐."


'나이 들어서 그래'라는 함정에 빠지면 '나이 들어서'라는 이유를 온갖 것에 다 갖다 붙이다가 적절한 골든 타이밍을 놓칠 수도 있다. 지금 여든의 저 말에는 따뜻한 위로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여든의 태평한 저 말에는 혼쭐 나는 치료가 더 필요하다. (그래야, 이 위로랑 오래오래 위로하며 살지, 이 사람아~~)


때론 나 같은 위로보다 의사 선생의 팩폭이 더 특효약이다.

여든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위로' 말고 '치료'다.




Pawel Czerwinski@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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