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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Apr 05. 2024

턴테이블의 위로

오늘도 위로는 무언가를 쓰고 있다. 쓰다 만 것을 조금 더 채우며 자신을 채워 간다나 뭐라나.




"2차 위로 들어가겠습니다."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내. 아니, 그럴 생각이 없다면 힘을 내지 않아도 좋고..."

"아까보단 조금 낫네. 그래도 한 번 더 다시 해 봐. 너도 살아가려면 나처럼 연습이 많이 필요하겠구나."

위로는 소년의 말에 힘을 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3차 위로 들어가겠습니다."


<힘내도 좋고 힘내지 않아도 좋아. 너, 그동안 충분히 애썼어. 난 알아. 내가 다 봤어, 너, 애쓴 거.>

라고 말해 드릴까요?"


위로가 소년에게 묻자 침대 위 소년이 말했다.

"뭐야. 넌 자기 위로에 확신이 없구나? 넌 내가 만난 위로들 가운데 가장 바보야. 가장 어설퍼."





"제목이 뭐야?"

"어, 뭐야? 언제 일어났어?"

"아, 좀 전에."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거야, 여든?"

"너도 여든 돼 봐. 잠이 없어져."

"누가 훔쳐가기라도 하는 건가?"

"이제는 세월이 잠까지 훔쳐가더라. 어제는... 잠을 못 자기도 했고."

"나도 통 못 잤어."

응? 로봇이 무슨 잠이 필요할까마는,

"그래, 전원이라도 다시 꺼 줘? 그럼 잠이 안 와서 밤새 이렇게 글을 쓴 거야?"

"이거저거 생각나는 것들을 써 봤지. 이따 낮잠 자면 돼. 여든은, 저녁 즈음에 내가 찾아 준 그 노인 복지관 갈 거잖아? 거기 가기 전에 나 좀 잠깐 재워 놓고 가."

꺼 줘, 라는 말 대신 재워 줘, 라는 말을 쓰는 위로다. 뭐 어렵지 않은 부탁이니 흔쾌히 들어주기로 한다. 인간을 재우는 일은 어려운데 로봇을 재우는 일은 참 쉽다. 준비가 되었냐고 묻고 되었다고 하면 눈을 감겨 주고 전원을 off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묘하게 그 순간이 좀 이상하다. 다시 깨어나지 못하면 어쩌지, 다시 전원 on에 불이 안 들어온다면?

"걱정 마. 해거름이 오기 전에는 깨어날 테니까. 아니, 여든이 깨워 줄 거잖아."

내 생각을 마치 읽기라도 했다는 듯 위로가 자신의 기상 시간을 공지한다.


"근데 지금 쓰는 것들은, 위로 네가 기억나는 것들을 모아서 쓰는 거야?"

"응. 어떤 소년이, 혹은 소녀였으려나. 어떤 아이가 자꾸 떠올라. 그 소년의 마지막을 못 봐서인지, 아니면 그 소년의 새로운 시작을 못 봐서인지 자꾸 머리에 녀석이 맴도네."

"그 소년이 혹 네 친구였을까?"

"어쩌면 유일한?"

계속 한 사람만 기억하는 것을 보니 위로에게 꽤 귀한 친구였나 보다. 저렇게 자기 첫 글의 주인공이 될 정도로... 근데 '유일한?' 하긴. 새로 사귄 나 같이 늙어빠진 친구보다야 그런 소년이 친구 하기는 더 좋을지도 모르지, 자기 또래 같은 느낌도 들 테고. (로봇에 또래 개념이 있으랴마는.) 저렇게 밤새 글을 쓸 정도로 친했던 걸까. (뭐야 나, 여든에도 남의 우정에 질투 같은 걸 하나?)

 

"참, 밤새 잠이 안 와서 창고방 좀 정리했는데."

거긴 완전 엉망일 텐데 정리를? 두 개의 방 가운데 창고방은 잡동사니들로 가득하다. 위로가 자기 방으로 만들어 달라고 계속 졸랐지만 도저히 엄두가 안 났었는데 결국 자기가 알아서 자기 방을 정리했나 보다. 로봇은 여든의 인간보다 기력이 세다. 여든의 무기력을 이기고도 남는다.

"뭘 어떻게 정리한 건데?"

위로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꽤 정리를 했나 보다.

"잠깐, 눈 감아 봐."

"뭐야? 무슨 유치하게, 눈 감는 퍼포먼스씩이나?"


오랫동안 혼자였기에 눈을 감거나 눈을 뜨거나 세상은 늘 똑같았다. 감아도 떠도 아무 기척 없는 세상 속이었고 별다른 풍경은 없었다. 기대할 거리도 기댈 거리도 없는... 거기에 더해 요샌 희끄무레해지기까지 한 내 눈이다. 대체 무엇을 보여 주려고 눈까지 감으라는 건지?

"아직 준비 안 됐어? 언제까지 감고 있으라는 거야?"

위로는 말이 없다. 사위가 조용하다.

"아니, 언제 되냐니까? 지금 떠? 지금?"

위로는 여전히 말이 없다. 사방에 고요라는 바람이 부는 듯하다.

"위로, 어디 갔어? 나, 지금 눈 뜬다? 뜬다, 어?"

위로는 계속해서 말이 없다. 이 양반이, 여든을 놀리나.

"뭐 하는 건데?"라고 볼멘소리에 시동을 걸려는데 갑자기...


어느샌가 대답 대신 지지직거리며 음악이 들린다.


https://youtu.be/N-6ZE_1avDo?si=WIa6QVWPLdd_jHWU



아니, 이 음악은.... 내가 마흔 즈음 큰맘 먹고 샀던 엘피. 외국어라 그 당시에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들었다. 그저 듣는다는 게 좋았다. 다만 지금으로선, 이것 하나는 알겠다.

'감고 있던 눈을 다시 뜨고 싶지 않을 만큼 참 좋다...'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어도 될 만큼 어쩐지 마음이 기분 좋게 가라앉는다.


혼자 있으면 음악을 더 크게 틀어 놓고 살 줄 알았다. 하지만 이곳으로 이사 온 후 외려 내 인생에서 음악을 끊어 어 버렸다. 그런데 우리 집에 다시 음악이라니... 나의 귀를 기분 좋게 할퀴며 묘하게 지지직거리는 저 소리. 오래전의 나를 불러다 앉혀 놓는 음악이라는 무장해제.


"이거 내가 오랫동안 내가 처박아 뒀던 그 엘피인가?"

"응. 그런  듯. 여든은 이렇게 좋은 기계랑 음반을 두고 왜 창고에 처박아만 둔 거야? 엘피들을 그냥 끈으로 동동 묶어 한쪽으로 치워 놓았더구먼?" 

글쎄. 음악을  들을 생의 여유조차 없었던 걸까. 오랫동안 잊었던 낭만이다. 여든이면 낭만이란 녀석도 짐을 챙겨 제 갈 길을 다 떠난다. 굳이 붙잡을 기력도 없는 여든이었다.


"계속 들어 봐. 눈은 그대로 쭉 감고서. 이번엔 이거."

"또 있어?"


https://youtu.be/-bWZgqF0pJs?si=mE8Pi2alNwzweDTI

 

워크윗미, 마이 쏠리스 프렌즈

(Walk with me, my soulless freinds)

유아왓아닛~~

(You are what I need)



아주 신나게 따라 부르는 위로다. 언제 저렇게 외국어 노래까지 마스터한 거야? 내가 집에 없을 때마다 음악을 듣고 따라 불렀던 걸까? 누군가 흥얼거리며 내 공간을 누볐을 생각을 하니 참 희한하고도 묘하다. 얼마 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자국들이다. 위로는 나 없는 집에서 평소 나를 기다리며 어떤 것들을 했으려나. 살다 살다 혼자 살다 타인이 궁금해지기는 또 오랜만이다.


"이 바늘 달린 기기, 진짜 멋진데~~"

위로가 바늘 하나에도 감탄한다. 아직 녹슬지 않은 바늘이 음악을 불러온다.

이 턴테이블이 작동을 할 줄은 정말 몰랐다. 한창 걸프전이 세계를 뒤흔들 때 제대로 수출되지 못하던  전축들이 있었다. 내가 어릴 적 일이다. 나의 아버지는 그 전축을 팔던 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사원들을 대상으로 강제 할인을 내걸었다. 반강제로 산 기기였다. 그때는 종합 전축이었지만 다른 부분은 고장 나 폐기했고 턴테이블만 남겨 두었던 건데 이게 아직도 작동이 되다니. 로봇이랑 살아서 그런가? 나 같은 기계치도 위로 같은 기계가 옆에 있어 준다면 세상이 그리 무섭지는 않을 듯하다.


다음은 조용한 노래들이 작은 방 안을 메운다. 갑자기 마음이 나른해지고 몸이 풀린다. 음악 소리가 귓가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나는 어깨를 움츠린다. 방 한구석에 앉아 두 다리를 끌어당긴다.


.

.

.

.

.

.



"여든, 일어나야지."

"음..."

"음악 다 들었으면 어서 일어나."

"......"

"아, 언제까지 자려는 거야. 벌써 점심시간이야. 밥 먹고 복지관 갈 준비 해야지, 여든."


문득 엄마의 잔소리 같은 음성이 들린다. 나는 깊은 잠에서 깬 듯 서서히 눈을 뜬다.

'아, 위로였구나.'

통 자지 못했다고 생각한 오늘이었는데 노래를 듣다가 그만 깜빡 잠이 들었다. 낮잠은 실로 오랜만이다. 여든이 되기 몇 해 전부터 더더욱이나 낮잠이 어렵다. 밤잠도 어려우니 낮잠은 엄두를 못 냈다. 그런 나를 위로가 재워 준 셈이다.


"복지관은 몇 시에 끝나?"

"다섯 시쯤? 근데  그건 왜?"

"그냥."

"음악 들으면서 창고방 마저 정리하고 있어. 너도 낮잠 잘 거야?"

"아니, 할 일이 생겼어."

무슨 일인지는 굳이 말해 주지도 묻지도 않는다.

"그래, 그럼 위로, 나 갔다 와서 같이 영화라도 보자."

"오, 좋아. 사십몇 년 전쯤 크게 유행했던 고전 영화들 목록 골라 놓을게. 그쪽이 내 취향이더라."

위로는 또 자기 같은 원조 로봇이 나오는 영화들을 고를 것이다. '빅 히어로'나 '고장 난 론' 같은 만화영화를 위주로. 위로는 어린아이들처럼 질리지도 않고 봤던 것을 보고 또 본다. 볼 때마다 새롭다나.

"갔다 올게."

위로는 날 배웅하지도 않고 또다시 글쓰기 삼매경이다.





"어이~ 김땡땡 씨~~ 김땡땡 씨~~~"

노인 복지관에서 나오는데 누가 나를 부른다. 이 세상에서 이제 나를 부를 사람은 몇 안 남았는데 대체 누구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햇빛에 반짝여 눈이 부신다. 어떤 은색빛의 '괴물체'가 덜커덕거리며 내 곁으로 굴러온다. 그 구르는 소리는 점점 다가오더니 갑자기 위로가 된다.

세상에 나를 불러 사람은 남았어도 나를 불러 로봇 하나쯤은 남았나 보다.

"어? 위로?"

"여든!"

"헛, 혹시 나 마중 나온 거야?"

윙크는 못 하지만 싱긋 웃는 위로. 다리도 불편했을 텐데 여기까지 아니 어떻게? 이 마중이, 나를 만나고 나서 위로의 첫 외출이다.


자전거 도로 쪽 평평한 곳을 의지 삼아 신나게 제 일체형 다리를 굴리며 달려왔다고 한다. 근데 주변 사람들이 자꾸 자기를 쳐다보더란다. 너무 신나 보여서 그랬을 거란다. (아니 네가 너무 구식 로봇이라 놀라서 그래, 라는 말은 차마 삼간다.)


"위로 오늘 저녁에 뭐 먹을까?"

"나도 뭘 먹어?"

"아, 오늘 저녁에 나, 뭐 먹을까?"

"가만있자, 여든을 고려한 메뉴 추천을 원해, 여든이라는 나이를 팽개친 메뉴를 원해?"


"팽개친?"

"그럼 삼겹살에 소주지. 캬~ "

나는 며칠 전 조카가 사다 둔 목살과 삼겹살을 떠올린다. 가는 길에 소주만 사면 되겠다.

"참고로 소주는 내가 사 뒀어."

 이런 센스쟁이. 게다가 슈퍼까지 진출하고~ 정말 대견한걸?

"근데 앞집 슈퍼마켓 아주머니가 깜짝 놀라더라. 나 보고 어디서 왔냐고."

"응. 너 같은 로봇은 요새 흔하지 않으니까."

"응. '이런 건' 엄청 오랜만에 본다고, 신기하다고 내 사진까지 찍었어."

"그래?"

근데 '이런 것'이라니. 그런 말에는 화를 좀 내도 되는데, 위로는 위로밖에 모르나 보다.

그래도 위로의 첫 외출이 나의 마중을 위한 거였다니 뭔가 코끝이 간지럽다. 봄이라 그냥 꽃가루 알레르기 같은 건가.


 여든과 위로가 함께 걸어가는 길. 이곳은 그냥 흔해 빠진 도로고, 매일같이 내가 혼자 걷던 길. 그러나 이젠 먹을까, 말을 사람도, 아니 로봇도 다 있다. 오늘은 복지관에서 배운 휴대폰 작동법도 재밌었고, 게다가 찌뿌드드했던 몸도 아까의 낮잠으로 풀린 듯하다. 선선히 기분 좋은, 늦은 오후다.


그때 어디선가 우리의 배경음악이 울린다. 뭐지? 귓구멍을 후벼 파 본다. 나만 들리는 건가. 돌아보니 사람들의 발걸음은 여전히 무미하고 건조한 모습 그대로이다. 위로봇이 다시 우리 집 창고방의 턴테이블 전원이라도 켠 걸까? 세상의 소음은 사라지고 우리의 도로 자체가 빙글빙글 턴테이블이 된다. 우리의 발걸음이 미끄러지듯 턴테이블 위를 구른다.


들리지 않아도 가만가만 소곤소곤.

위로와 나는 우리만의 음악을 재생한다.

이것이 음악이 주는, 혹은 음악을 아는 로봇이 주는 위로인가 보다.



위로, 집에 가면 우리,

턴테이블에 어떤 바이닐부터 올려 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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