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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Mar 28. 2024

쓰다 만 것의 위로

"사 왔어?"

"어. 마트에서. 너도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거긴 구경할 게 많거든."

"구경 같은 건 공짜야?"

"말해 뭐 해. 시식도 공짜야."

"재밌었겠네."

너랑 간 건 아니라서 덜 재미있었다는 말까지는 안 했다. 그렇게까지 말해 주면 기고만장해질 녀석이다.

"근데 보다시피..." 

위로는 잠깐 말을 끊었다 다시 잇는다.

"난 아직 바깥세상이 불편하네. 연습을 좀 해야겠지."


위로는 자기 하체를, 아니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탱크 바퀴처럼 둥글게 굴러가는, 자신의 일체형 다리를 가리키며 별수 없지, 라는 표정을 짓는다. 우리나라 도로는 턱이 너무 많긴 하다. 앞으로는 위로가 편하게 구를 수 있는 곳 위주로 다녀야 할 듯하다.


"근데 꽤 비싸더라. 그래서 그런지 유리 진열장에 뭔 비밀번호로 잠가 놓고 팔던데?"

"근데 어떻게 샀어?"

"거기 전화번호가 있더라고. 살 거면 연락 달라더라."

"어디 사 온 것 좀 내놔 봐."

"여기."

지난주 내 카드 포인트를 현금으로 만들어 준 기념으로 위로에게 외장하드를 사 주기로 했었다. 로봇에게까지 '삥'을 뜯기는 것 같아 속이 좀 쓰리긴 했지만 녀석이 귀신같이 찾아낸 돈이니 참기로 한다.

"오, 마음에 드네. 큼직하니 왠지 엄청난 글을 써 둘 수 있을 것 같아."

"근데 외장하드까지 필요하다는 네 글쓰기라는 게 대체 뭐야?"

"아, 내 글쓰기?"


요즘 위로는 부쩍 말이 줄었다. 딱히 우울해 보이는 건 아니고(하긴 로봇이 우울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무언가를 구태여 기어이 굳이 쓰겠다고 '글'로 오두방정을 떠느라 '말'은 좀 줄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말하는 횟수가 준 것이지, 저 혼자 하는 말은 늘었고 그것을 종종 글로도 남기겠다고 내 휴대폰을 가져가곤 한다. 음성녹음 앱을 켜서 10분 동안 뭐라 뭐라 중얼거리면 텍스트 변환 작업을 통해 위로의 목소리가 활자들로 뒤바뀐다.


자신이 녹음해 놓은 것을 듣지도 보지도 말라 신신당부를 해서 위로가 안 보는 곳에서만 그 신신당부를 지키며 슬쩍 들춰 봤더니 뭐, 별것도 아니었다. 그냥 첫날에 깨어나서 주절거렸던 것들과 비슷하다. 대개는 낱말 위주다. 가령, 위로, 여든, 집, 창문, 나무, 물까치, 봄, 고양이, 개, 개 짖는 소리. 고양이들의 조찬 모임... 정말 너무나도 아무 의미 없는 낱말 나부랭이 같은 것들.


"그니까 위로 넌, 뭘 쓰겠다는 건데?"

뜸을 들이는 위로에게 다가가 확 김을 빼며 밥솥 문을 열어젖히듯 위로에게 대회의 포문을 재촉한다.


내 글쓰기란 말이야... 일종의 놀이 같은 거랄까?

놀이?



내 기억을 이어 붙이는 놀이를 좀 하려고. 군데군데 흩어져 있거나 엉키어 있는 그런 기억 조각들을 모아 보려고. 아직은 모자이크 수준이지만 말이야. 그러면 내 기억상실 증세가 좀 사라질지도 모르잖아. 근데 문제는... 글쓰기가.. 이게 기억을 모으는 건지 내 마음대로 기억이란 걸 조작하는 건지 나도 날 모르겠어. 쓰다 보면 내가 기억을 쓰는 건지 기억이 나를 쓰는 건지...


"아. 이런 거네? 네가 글을 쓰는 건지, 글이 너를 쓰는 건지?"

"응. 그래도 쓰긴 써야지. 그래야 뭐라도 좀 더 기억이 나지 않을까? 일단 글을 쓰다 보면 기억의 퍼즐이 조금이라도 맞춰지겠지, 뭐."


얼른 자기 할 말을 마치고 위로는 내 낡은 노트북을 꺼낸다. 거기에 외장하드를 제법 능숙하게 연결하는 위로다.

"위로, 그래, 뭘 쓸 건데?"

옆으로 찰싹 달라붙어 본다. 위로가 더 옆으로 달아난다. 위로는 달라붙는 걸 딱 질색한다. 명색이 지 이름이 '위로'면서 그런 식의 위로는 질색팔색을 한다. (위로도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나.)



위로는 한동안 더 말이 없어진다. 그런 위로가 낯설다. 위로의 머릿속, 아니 메모리 속에서는 무슨 이야기가 생겨나는 걸까. 가만히 지켜보니 머리를 도리도리, 눈을 질끈질끈, 섬세하지 못한 네 개의 손가락으로 독수리 타법 글쓰기를 시도한다. (위로의 자판이 좀 더 커야 할 것만 같다. 자판은 로봇용이, 아니 노인용이 없으려나. 위로봇에게도 노인용이 필요한 듯하다.)


그 뒤로도 위로는 몇 시간째 지금도 저리 글을 쓴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는 듯하다. 글을 쓰면 저렇게 되는 걸까? 웬일로 내가 저녁 혼밥을 하는데도 옆에 와서 쫑알거리지도 않는다. 오로지 글쓰기라는 것에만 자기 시간을 온전히 몰두하는 위로봇. 그것이 조금 섭섭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신통하기도 해서 위로 곁에 다시 들른다. 어느새 고개를 노트북에 처박고 심히 고뇌에 빠진 위로다.



'대체 뭘 쓴다는 건지...'

가까이 가 보니 고뇌에 빠진 게 아니라 잠에 빠진 위로였다. 화면을 바라보니 그래도 제법 긴 분량으로 무인가를 쓰긴 썼다. 위로의 머리를 옆으로 슬쩍 치우고 스크롤을 내려 본다.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위로'가 있었다. 다들 바빴다. 출근을 하거나 가족을 돌보거나 아니면 친구를 만나거나 혹은 상사에게 깨져야만 했다. 사람들은 바빴고, 그래서 사람들은 위로가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위로는 점점 외로워졌다.

이제 위로를 주워 갈 사람은 더는 없어 보였다. 쓰임이 없어지자 위로의 점수는 점점 하향곡선을 그리게 되었다.


그때 A 씨가 위로를 찾아와 그를 주워 들었다.

"네가 필요해."

A 씨는 위로를 아예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위로가 그 집에서 목격한 것은 침대에 누워 간절한 위로를 기다리는 자그마한 누군가였다.


A 씨가 말했다.

"급하게 위로가 필요해. 저 녀석에게 말이야. 좀, 해 줄 수 있겠어, 위로?"

위로가 말했다.

"네, 그럼요.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위로는 침대 위 소년에게 상황을 보고하였다.

"1차 위로를 시작하겠습니다."

소년은 힘겹게 고개를 돌려 위로를 쳐다보았다.

오랫동안 녹슨 위로였지만 위로는 침대 위 허연 얼굴의 소년에게 가장 흔한 위로를 건넸다.

"힘내."

3초간의 정적이 흐른 후, 소년은 겨우 입을 떼고,

"그게 뭐야. 한 번 더... 다시.. 해 봐."

라고 말했다.





뭐야. 옛날 일은 기억이 안 난다더니 자서전이라도 쓰는 건가? 아님, 뭐 소설이라도 쓰나? 내가 자기 이름을 위로라고 지어 주자마자 자기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쓰는 거야?



"아, 왜 남의 글을 훔쳐봐?"

어느샌가 일어나 노트북을 자기 앞으로 돌려세우는 위로다. 사춘기가 시작된 인간처럼 숨기는 게 많아진다.

"누가 잠들랬간?"

나는 변명을 내뿜다 문득 이런 질문을 툭 던진다.

"근데 그거 결론이 있는 이야기야? 그 이야기?"

"아, 이거? 나도 모르겠어. 내 이야기 같기도 하고 내 이야기가 될 것 같기도 하고."

알쏭달쏭 뜻 모를 이야기를 하는 위로다.


"근데 결국 결론을 못 내리면 그 이야기는 말짱 도루묵이 되는 거 아냐?"

"다 쓰지 못하면?"

"응. 보아하니 그 글이 뭔가 마무리가 잘 안된 것 같던데."

"상관없어. 글의 끝이 무언지가 뭐가 중요해."

"응? 끝이 안 나는 이야기도 있어? 재미없잖아."


인간도 그렇지 않아?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어야 한다는 법칙 없잖아. 다 살아내지 못해도 제대로 산 인간이 있고 늙어 죽을 때까지 살아도 제대로 산 게 아닌 인간도 있고. 그러니까 내 말은...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위로. 갑자기 낯설다.


쓰다 만 것도 위로를 줘.

쓰다 만 삶도 그렇고.


위로는 다시 안경을 쓴다. (물론 안경은 내 돋보기안경이라 로봇에게는 쓰나 마나다. 그런데도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작가처럼 보이고 싶다며 저렇게 안경을 고집한다.)



"위로?"

"응?"

"근데 정말, 쓰다 말아도 괜찮아?"

"응. 물론이지. 글도 인생도 쓰다 말아도 오케이."


위로의 이야기를 들으니 오늘 밤, 갑자기 글이 쓰고 싶어진다.

위로가 저렇게 글쓰기에 푹 빠진 것을 보니 글쓰기라는 거, 거기에 뭐라도 하나 있긴 있을지도...?



쓰다 만 위로의 글에서 쓰다 만 것들의 위로를 읽는다.

오늘은 글이란 걸 쓰느라 밤이 길어질 것만 같다.

그리고 그 글은 인생 여든 만에 처음 써 보는 글이 될 것 같다.






(사진: samlydesign@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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