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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Mar 14. 2024

오늘의 위로

"내가 어떻게 여기 오게 된 거야?"

어린 녀석이, 아니 왠지 동안으로 보이는 이 로봇 녀석이 눈을 뜨자마자 내게 대뜸 반말로 묻는다. 끙... 내 나이가 여든이라고, 이 사람아, 아니 이 로봇아. (사람으로 치자면, 생긴 것은 꼭 청소년 즈음의 로봇 같은데.) 하지만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로봇이라 내가 참는다. 나도 반말을 하는 수밖에.


"기억나는 게 그럼 하나도 없어?"

"아니. 몇 개쯤 기억나긴 하는데. 정확히는 잘... 내가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것 같아."

잔 게 아니라 배터리가 꺼졌던 거겠지, 라고 정정해 주고 싶지만 이내 관둔다. 겉모습이 아주 허름하고 비루한 것을 보니 며칠이 아니라 몇 년, 혹은 몇십 년은 굶은, 아니 충전을 못 한 로봇 같다. 

"나, 그럼 기억상실 뭐 그런 건가?"

스스로를 기억상실 환자로 규정하는 로봇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봤어도 기억상실 로봇이라니, 이건 뭔가 말이 안 되는 구도다. 어디 메모리에 바이러스라는 마(魔)라도 낀 것인가.

"나, 참. 내 이름도 기억이 안 나다니."

혼잣말로 자신을 힐난하는 로봇이다. 로봇치고 참 희한하다. 자기가 어떻게 불리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이름쯤은 뭐, 이 노인이 지어 줄 수도 있다. 


"너, 이름이 갖고 싶어?"

"응!"

깨어나서 가장 반짝이는 눈빛이다. (아니, 로봇이니까 그냥 눈깔이라 해야 할까. 그래도 그 순간 좀 반짝이긴 했다. 어딘지 모르게 별빛 같던 눈깔, 아니 눈빛.)

"너 하는 거 봐서 내가 지어 주지, 뭐."

녀석이 보지 못하는 뒤통수에 이미 너의 브랜드명과 너의 넘버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은 비밀로 한다. 우리 집에는 큰 거울이 없다. 당분간은 자기 이름을 눈치채지도 못하겠지. (늙어가는 내 꼴이 좀 별꼴이라 냅다 치워 버려서 우리 집에는 손거울만 한두 개뿐이다.)

"그건 차차 짓기로 하고, 그럼, 너. 기억난다는 건 어떤 것들이야?"

"흠. 글쎄."

뒤통수에 '(주)위로, 위로230'이라 적힌 이 위로봇은 퍽퍽한 양철 눈꺼풀을 천천히 감는다. 자신의 기억을, 즉 몇 개 남은 그 장면들은 되짚는 모양이다.


"마음을 자늑자늑 두드리는 오후의 햇발. 귓가를  간질이는 길고양이들의 가만가만한 발자국 소리. 많이 써서 닳고 낡아 버린 몽당연필의 서걱거림들. 빙글빙글 돌아가는 검은 바이닐 속에서 터져 나오던 누군가의 목소리 연주. 음. 그리고 자기만큼이나 커 버린 새끼 직박구리를 먹이던 어미 직박구리의 도리도리 도리질. 뭐 이런 것들이 무작정 떠오르네. 아, 그리고 침대 끝에 앉아서 내가 무언가 간절한 마음이었던 것도 어렴풋이 기억이 나. 아니 이런 건 인간들 말로, 느낌, 뭐 이렇게 표현해야 하나? 아무튼 기억이 날 듯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뭐 지금은 이것뿐이야."


양철 눈꺼풀이 다시 찬찬히 열린다. 근데 로봇도 저렇게 회상에 잠기는 눈빛일 수가 있을까. 노인 한 명당 로봇 하나를 배당해 주는 시대라지만 어쩐지 이 로봇은 무언가 그 로봇들과는 다른 것 같다. 그래, 역시 주워 오길 잘했어.


이제 갓 여든이 된 '노인80'은 자꾸만 이 위로봇, 아니 '위로230'이 궁금해진다.

어쩐지 어제와는 다른 내일이, 혹은 다른 위로가 펼쳐질 것만 같은 느낌이다.


지금은 이 느낌을, 아니 오늘의 이 '위로'를 믿어 보고 싶다.




(사진: Matthew McBrayer@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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