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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Mar 21. 2024

돈독 오른 위로

소설 <위로봇의 땔감들>

"아니, 아침 댓바람부터 남 휴대폰 갖고 뭐 하고 있어?"


자칭 '기억상실 로봇'이라면서 내 휴대폰 패턴은 한 번 보고도 잘도 기억해 내는 위로다. 저거, 진짜 기억상실인 거 맞아?

"나 바빠. 말 걸지 마."

콧방귀를 뀌어 준다. 바빠? 나 같은 여든 노인이나 너 같은 철 지난 로봇이나 바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시간이 남아돌아 아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뭐 하느라 그런 건데?"

"아, 참. 말 좀 걸지 말라니까."

"바쁜 척하기는."


"근데, 어쩌려고 그래?"

뜬금없이 고개 들어 나를 나무라는 위로다.

"뭘?"

"어제 온 고지서 보니까 아주 가관이더구먼."

"고지서?"

"그래, 지난달에도 안 내서 두 달 치 내라고 왔더라."

'공과금?'

나는 갑자기 귓불이 조금 뜨겁다.

"(휴...) , 깜빡한 거야..."

나는 뒤를 얼버무린다.

"아 맞다. 그리고 부재중 전화 보니까 집주인이라고 떴던데 그건 또 왜 안 받았어?"

저 철부지 위로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하겠나. 노령기초연금과 국민연금, 젊을 때 벌어 놓았던 약간의 쥐꼬리 같은 돈을 갉아먹으면서 사는 게 얼마나 조바심 나는 일인지, 또 월세 감당하는 일이 얼마나 퍽퍽한지, 로봇이 인간 세계를 알면 얼마나 알겠느냔 말이다. 그것도 몇 년일지, 혹은 몇십 년 만에 깨어난 것일지 알 수도 없는 기억상실 로봇이!


역정이 난 여든 노인을 옆에 두고 위로는 휴대폰에만 코를 처박고 있다. 그런데 모름지기 위로봇이라면, 눈이라도 맞추고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 요즘 로봇들은 예의가 없네.

뭘 하기에 저리 코를 처박나 옆에서 지켜보니 자꾸 뭐 개인정보 동의를 하고 앱을 깔고 아주 난리도 아니다.

"아니 그거 막 동의해도 되는 거야?"


걱정 마. 이런 좋은 앱을 까는 데 뭐가 문제겠어. 돈 주는 앱이래. 걸어 다니면 포인트 주고 글 쓸 때마다 포인트 주는데, 만 포인트 넘으면 현금 지급! 필수라고 되어 있는 거랑 선택이라고 되어 있는 모두에다 죄다 동의한다고 했어. (뭐!???) 내가 검색해 보니까 어디 마케팅 같은 거에 네 정보를 팔아넘기겠다고 하는 거 같더라. (오 마이 갓뜨..) 정보랄 있어. 그냥 여든 노인인데.


아니, 이 로봇이! 사람 나이 갖고 차별하네? 끙...

"그래서, 그게 다 뭔데?"

언뜻 보니 클릭할 때마다 물컵에 물을 따르는 이미지가 보인다. 물 마시기 체크하면 포인트를 지급한다나. 그리고 계좌로 입금, 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 '확인'을 누르려 위로봇이다 아, 안 돼. 그런 거 보이스피싱 같은 거라고. 넌 옛날 사람, 아니 옛날 로봇에다 기억상실이라 잘 모르겠지만.

"아니야. 포인트를 자기 계좌로 입금하겠냐고 묻는 거야."

"그, 그런 거야? 확실해?"

"그건 나도 잘 모르지. 한번 눌러 봐야 알지."

끙끙...

"여기 봐. 맞는 거 같아, 돈이 들어왔어. 내가 돈 만들어 준 거다! 자, 봐봐."

"어디 어디?"

그러고 보니 어제 통장 잔액보다 13만 7천 4백 원이 늘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 가만 보니 누가 입금을 한 것 같다.

"아니 이거 막 그런 거 아니야, 통장협박, 이런 거? 계좌번호 알아내 가지고 그냥 돈 일부러 막 넣고, 그래서 자기가 스스로 신고하면 갑자기 보이스피싱범으로 몰리고, 피해자끼리 가해자와 피해자 되고 막 그러는 거! 그제 뉴스에도 나왔다고!"

"아니, 이 사람이 어디 속고만 살았나. 이 로봇을 믿어 보라고. 이건 그동안 그쪽이 모아 놓은 카드 포인트를 현금으로 돌려받은 거야. 포인트가 13만 점이 넘더라? 그걸 자기 계좌로 입금하겠다고 하면 현금으로 지급되는 거야. 자, 우리 뭐 사 먹을까?"


"뭐야, 그럼 이게 원래 내 돈이었다고?"

"그래그래. 이게 우리 돈이라고, 우리 돈!"


묘하게 주어가 바뀐 느낌이 들긴 하지만, 뭐 어쨌든 가뭄에 단비 같은 돈이라니!

"거기는 치킨 시켜 먹고 나는 외장하드 좀 사 줘."

"외장하드는 왜?"

"아, 나 글 좀 써 보려고. 무언가 기억날 때마다 쓸 거야."

유에스비 작은 것도 아니고 외장하드씩이나? 집에 종이랑 펜도 많은데.

"속으로 딴생각할 생각 말고 외장하드로 사. 13만 원에서 반은 공이야. 나 아니면 평생 이런 걸 어떻게 알았겠어?"


하긴, 그건 그렇다. 요새 저 로봇 아니면 평생 모를 일을 알게 된다. 급기야는 녀석 덕분에 또 돈을 벌었다. 돈 때문에 축 처져 있었는데 마치 로또 4등에 당첨된 기분이었다.


띠딕. '축하금, 100만 원.'


"여기 봐 봐."

"웬 100만 원?"

"몰랐어? 복지사가 가끔 온다면서 이건 말 안 해줬어?"

"뭔 종이쪽지를 주고 가긴 했어. 카톡으로 안내 문자도 같이 보내 준다고 하긴 했는데 귀찮아서 안 봤어."

"집 밖에 바로 현수막도 걸려 있더구먼, 눈 좀 제대로 뜨고 다니라고."

"나, 눈이 나빠."

"그래? 노인이랑 같이 살면 뭔가 할 게 군. 눈에 관해서도 나중에 좀 알아봐야겠다. 아무튼 이 백만 원은, 축하하는 거래. 아니 위로하는 건가."

"뭔 축하? 웬 위로?"


여든이라고 축하하는 거야. 여든까지 사느라고 고생했다 이거지. 소위, 장수 축하금.


"여든? 나이 먹어서 주는 거란 말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네."

"그럼.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지. 그리고 얼마나 다행이야, 여든 전에 죽었으면 그거 못 받았을 거잖아."

위로 너, 말 참 예쁘게 한다? 하지만 뭐. 돈이 주는 위로를 마다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니까 문자 좀 확인하고 다녀. 다음 달엔 버스비 신청해야 하는 거 알지?"

"응? 그건 또 뭐야?"

"아니 이 양반, 갈 길이 멀구먼. 노인은 돈 준대, 버스 탄 돈, 석 달마다 다시 돌려준대. 쓴 만큼 환급. 농협 가서 신청해야 한다고."


아니 이 로봇은 내 세상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며칠 동안 내 휴대폰을 이리저리 뒤지더니 온갖 것을 알아낸다. 이 위로봇이 대체 어떻게 나한테 온 걸까. 위로 덕분에 돈이 온다.


"근데, 그럼 그쪽이 지금 여든인 거야?"

"어, 딱 여든."

"아, 그렇구나. 그럼 지금부터 그쪽을 '딱여든'이라 부를게. 이름은 여든, 성은 딱."

"아니 사람이 이름이 있는데, 웬 여든?"

"아흔보단 낫잖아."

"뭐?"

말이라도 못 하면. 내 이름은 따로 있다고.

"아흔 되어서도 여든이라 불러 줄게."

갑자기 위로봇이 제안 하나를 한다.

"그럼 됐지? 백 살 되어서도, 백스무 살 되어서도 여든이라 불러 주면 되게 젊어 보일 거 아냐?"

"그, 그런가?"

여든에 새로 얻은 이름, 여든이라.

"아, 참. 내 이름 지어 주는 거 잊지는 않았겠지?"

나는 위로봇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여든~여든~ 얼마나 듣기 좋고 부르기 좋아?"

신이 나 보이는 뒤통수를 하고서 여기저기 물 흐르듯 구르며 사방팔방을 휘젓고 다니는 위로봇이다.


그래, 그때까지 여든이라 불릴 수 있는 '나'이길,

그때도 위로, 너와 함께이길.


위로봇이 다시 내게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며 만 여든이 된 나를 축하한다. 오늘만큼은 나와 위로, 아니 '우리'는 백만 원어치의 미소를 남발해 본다. 며칠 사이 정든 위로의 차가운 어깨가 내게 묘한 위로를 준다.


내일은 나도 위로에게 위로라고 불러 줘야지, 위로라는 이름을 꼭 지어 줘야지.



<그날의 에필로그>

-뭐 해? 또 돈 벌어?
-말 걸지 마, 나 바빠.
-매일 휴대폰밖에 안 하면서 뭐가 바빠?
슬쩍 다가가 들여다본다. 오늘 저녁엔 또 무얼로 돈을 벌려고? 출석 체크 포인트라도? 아니면 쿠땡 반값 할인 제품이라도 검색하나?
-뭐야! 너, 지금 게임 앱에서 장비 사는 거야? 갑옷까지? 헉, 전부 다 해서 오, 오, 오십 만 원? 위로! 당장 그 휴대폰 내려놔!
-내 이름 이제 위로야? 언제 정했어?
-아니, 위로! 고만 사라고, 고만 클릭해!
-여든, 백만 원 받았으면 그중에 반은 내 거잖아. 안 그래? 오십 만 원은 이제 이 위로 몫이라고.

아, 두(頭)야. 내가 애를 키우는 건지, 로봇을 키우는 건지.
이러니 내가 늙을 수밖에 없다.
읭? 아니, 벌써 늙을 건 다 늙었나?












(사진: Solen Feyissa@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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