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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Jun 01. 2024

심부름은 잘합니다만

"그냥 내일 나가는 길에 내가 찾으면 돼."

"아니에요, 아부지. 제가 조금 이따 엄니 배웅하러 나가는 길에 돈 찾아올게요."

"그래?"

"네. 걱정 마시어요."


엄니를 전철역까지 배웅해 드리고 역 근처 공원에서 트랙을 몇 바퀴 돌 예정이었다. 처음 계획은 그러했는데 이왕 나선 길에 엄니를 즉흥적으로 약속 장소까지 모셔다 드렸다. 운동복 차림으로 시내까지 다녀온 나는 전철역 인근 공원에서 오늘의 '최종 목적'이었던 '열심히 달리기'를 시작하였다. 모자를 고쳐 쓰고 바람을 가르니 기분이 꽤 상쾌했다.


"아, 시원해!"


땀을 흘리면 묘하게 시원하다. 나는 뿌듯한 마음을 지닌 채 바로 옆 도서관에 들러 잠시 책을 구경했다. 주말을 즐기는 법을 깨달아 가는 듯해 또 한 번 기분이 좋아졌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아부지, 밥 차려 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토요일 오전부터 주말 기분을 상당히 즐긴 덕에 의욕적으로 점심 밥상을 차렸다. 아부지와 점심을 먹고 나서 티브이 앞에 나란히 앉아 있는데 이내 아부지가 내게 말씀하신다.

"근데 돈은 찾아왔냐?"


"눼에에?"


도.. 돈이요???????




A라는 목적지를 향하려고 어떤 길을 가다가 중간에 B나 C 등 다른 곳을 들르면 난 종종 애초의 목적지를 잊는다. 나의 '최종 목적'은 달리기가 아니라 '돈 찾기'였어야 한다. 자진해서 심부름을 하겠다고 호기롭게 이야기를 해 놓고 그 호기를 스스로 꺾어 버린다. 비단 이번 일뿐만이 아니다.



나: 나, 어제 황당한 일 있었잖아.
친구: 왜?
나: 엄마가 달걀 사 오라고 했거든?
친구: 응. 근데?
나: 근데 내가 원 플러스 원 두부를 사 가지고 갔어.
친구: 뭐?
나: 심부름 가면서 까먹었는지 엉뚱한 걸 사 갔어. 집에 가서야 알았지 뭐야.
친구: 야!
나: 왜?
친구: 야, 네가 초등학생이냐, 자기가 먹고 싶은 거 사 가게? 크크크.



문득 넉 점 반이라는 동시가 떠오른다.


윤석중 시/이영경 그림/창비 출판사


가게에 가서 몇 시인지 물어보고 오라는 '심부름 사명'을 받고 아이는 집을 나선다. 가는 길에는 온갖 풍경이 유혹의 반찬처럼 놓여 있다. 그리고 이것저것 실컷 동네 구경 다 하고 해가 꼴딱 지고 나서 들어가서는...


"엄마, 시방 넉 점 반(네 시 반) 이래."



이 아이는 '덤벙'쪽보다는 '자기 세계'에 빠진 쪽인 듯하긴 하지만.. 오늘따라 이 아이와 나의 자아가 겹쳐 보이는 까닭은 무엇...?



아무튼 돈 찾아오는 심부름을 홀랑 깜빡한 나.

"돈 찾아왔어?"

"돈...? 무슨 돈이요? 아, 맞다.... 헉.."


아부지는 내 반응을 보고도 아무 말씀을 안 하신다. '뭐 늘 자주 겪어 왔던 일'이라는 표정으로 당신 방으로 유유히 들어가신다.



나는 이렇게 다른 이들의 기대를 살포시 무너뜨리면서 참 속도 편하게 잘도 살아간다.

덤벙의 묘약은 오늘도 나를 정신없이 휘몰아친다.



(사진 출처: nrd@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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