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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Jun 16. 2024

이게 다 치운 겁니다만

어디에 뒀더라.

어디에 뒀더라.


나는 오늘도 '물건의 제자리'를 잊는 동시에 나 자신의 제자리도 잊는다.

'분명 여기에 둔 것 같은데... 아닌가?'


덤벙의 매력(?)은 '질서 없음'이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것도 묘한 재주라면 재주.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덤벙의 흔적이 내 방에 어지러운 발자국들을 남긴다. 내 방을 지나치던 나의 가족들조차 발걸음을 멈추고 덤벙이 혼재된 내 방을 들여다본다. 그러다 어느 날엔 보다 못해 한마디를 꺼내곤 하는데..


"네가 계속해서 시험에 떨어졌던 이유를 알겠다."


언젠가 아버지가 내 방을 보고 이렇게 선언하셨다. 계속되는 내 낙방의 이유를 드디어 찾았노라고. 나의 방이 낙방을 여실히 보여 주는 명백한 증거라 하셨다. 내 머릿속과 방의 배치가 비슷할 것이니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머리로 합격은 요원했으리라고.

그 말을 듣고 내 방문 뒤를 돌아다보니 과연... 아버지 말씀대로 내 머릿속은 내 방의 난장판과도 닮았다.

'아버지는 대체 내 머릿속을 어떻게 추측하신 거여? 가만, 그럼 내가 그래서.. 육칠 년을 불합격?'

인정하기 싫었지만 인정해야 했다. 성공하지 못한 자는 핑계도 필요 없다.


세월이 약인지 독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독을 품고 악바리처럼 내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와 같은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 인생은 좀처럼 '반전 서사'를 쓰지 못한다.) 다만 수집증 환자의 방처럼 여기저기 물건을 늘어놓던 방, 머리카락을 한쪽 구석에 슬며시 모아 두던 정신머리 없던 그 방에서는 가까스로 탈피했다. (나도 드디어 인간이 되긴 된 것이다!)


인간이 된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인생을 포기하는 대신 시험을 포기했다. 내 방에서 몇십 권의 수험서나 문제집이 사라지니 드디어 방이 방다워졌다. 다행히도 내 인생은 '나' 대신 내 방구석을 구원하기로  것이다. 정리와 정돈이 하루를 넘기지 않는 날이 늘어갔다. 나의 '정리력'에 자부심이 조금씩 늘어가던 그 어느 날...



"아니, 엄마. 언니 방, 꼭 우리 애들 방 같지 않아? 깜짝 놀랐다니까?"

시집을 갔으면 자기 집 방만 치우면 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주인도 없는 집에 들이닥쳐 내 방의 꼬락서니에 혀를 차던 동생. 결혼식장에 가느라 급히 방 안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정없이 어지럽혔던 하필 그날. 집에 도착하고 보니, 동생이 내 방을 기어코 정돈해 버린 것이다. (아, 근데 왜 정리 잘하는 사람들은 남 물건을 정리해 주고 싶어 안달인 걸까?)

치워 달라고 한 적도 없거니와 잔소리를 받아 주겠다고 오케이 사인을 한 적도 없다. 어지러운 내 방이 보기 싫으면 그저 방문을 닫고 조용히 나가 주었다면 좋았으려만 동생은 제부 씨 앞에서까지 내 방의 무자비함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물론 제부 씨라고 해서 나의 '정신없음'을 모를 리야 없었겠지만.)


평소 허허실실 풍선에 바람 빠진 듯 희희낙락 웃어 젖혀 버리는 언니이자 이모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 들으라고 엄마에게 내 방의 혼돈을 고자질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영 나쁘다. 농담을 80% 섞은 표정이긴 한데 웃는 모습에 갑자기 더 기분이 상한다. 아무리 내가 쌍둥이 조카를 사랑한다지만 아직 열 살도 안 된 아이들의 정리정돈력을 나와 비교하다니! 자꾸만 '덤벙'만 가득한 내 방을 공격해 대니 내 귓구멍이 간지럽다 못해 뇌세포까지 곤두서기 시작한다. (결국 농담을 진담으로 맞받아치며 뾰족하게 내지르고야 말았다.)



하지만 방문을 닫고 들어와 가만 생각해 본다.

동생이 과연 괜히 저럴까?  

아부지가 괜히 저러셨을까.


물건을 어디에 뒀는지 모르는 이유는 방을 제때제때 정돈하지 않아서다. 한동안 잃어버렸다고 믿었던 물건들이 며칠 만에 까꿍, 하고 나타나는 것도 정돈 실력이 아직 일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

덤벙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치우기 시작했다.

'보여 줄게~ 완전히 달라진 나~~ (에일리 목소리 버전)'



개과천선 덤벙이는 오늘도 틈만 나면 방을 치운다!

일정한 장소에 물건을 두는 것도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 (가끔은 멍멍이 훈련처럼 나를 훈련한다.)

어느덧 내 방이 무척 자랑스러워지던 무렵.... 


"방 좀 치워라."

"눼? (이 방을요?)"

"치우라고."



저기, 아버님, 어머님..

이게 다 치운 건뎁쇼??


오늘도 세상의 기준에서 살짝 멀어져 간다.

덤벙꾼의 방 안은 오늘도 내 머릿속과 묘하게 또 닮아 있다.




(사진: No Revisions@unsp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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