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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Oct 10. 2024

이 에피소드, 넣을까 말까

뒤늦은 망설임

'비혼을 때리는 말들'을 이미 다 썼다고 생각했다. 가제본 1권은 이미 수령했고 상황은 어느 정도 종료되었다. 아니 그래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이라는 것이...


그런데 에피소드를 추가해야 한다는 내적 외침이 어디선가 들려온다.


-시간이 없는데 에피소드를 추가한다고? 써 뒀긴 하고?
-아니요.
-그럼 어쩌려고?
-그냥 지금 쓰려고요.
-왜?
-아... <2인 이상> 이 단어가 자꾸 맴돌아서요. 찍어 놓은 사진도 문득 떠올랐고요.



-지금 자네는 노래 제목은 떠올랐는데 아직 곡은 쓰지 않았어요, 라는 것과 마찬가지군.
-아하하. 그렇긴 하죠. 목차에 이 문장을 꼭 집어넣고 싶어요.
-확신은 있나?
-이것으로 이야기 하나가 나올 것 같거든요. 제 안에 이야기가 분명 있을 것 같아요.


내 안의 '글쓰기 자아(自我)'가 주인님(본체=나)에게 '시간'과 '노력'과 '새로 글쓰기'를 요청한다.


주인님: 오늘 내로 쓸 수 있겠나? 인쇄 일정이 빠듯해.
글쓰기 자아: 네? 아니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죠!
주인님: 다음 주에 내다 팔 거라면서 언제 다시 써서 그걸 또 새로 만드누...
글쓰기 자아: 해 봐야죠. 할 수 있을 겁니다!
주인님: 글이 포부만으로 되나... 뭐, 그래. 행운을 비네.


내 글쓰기 자아를 위해 10월 9일, 한글날을 온통 내주었다, 휴식을 포기하고.


<글쓰기 자아(自我): 하아... 앞부분은 썼는데... 늘 결론이 안 나, 결론이. 어려워... 아. 어쩌지. 아, 그냥 이렇게 대강 마무리해야겠다. 에피소드 추가한 것에만 의의를 둬야지, 뭐. 아, 몰라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글쓰기 자아는 늘 일만 저질러고 본다.


글쓰기 자아: 컨펌받으러 왔습니다.
주인님: 그래, 다 썼나?
글쓰기 자아: 쓰긴 다 썼습죠.
주인님: 흠... 내용은 좀.. 형편이.. 없지만 그래도 분량은 나쁘지 않으니 그래, 그냥 추가하도록!
글쓰기 자아: 오! 감사합니다.
주인님: 그거 들고 편집자 자아를 찾아가 봐. 아마 녀석은 지금 가제본 살펴보느라 바쁠 거야. 어제는 종이 결이 잘못된 것 같다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더구먼.
글쓰기 자아: 아, 그렇군요. 네! 가 보겠습니다.


유미의 세포들의 '작가세포'를 조금 닮은 듯한 나의 '글쓰기 자아'가 이번에는 '편집자 자아'를 찾아간다. 편집자 자아는 원래 원고 교정 및 편집만 담당했었는데 '독립출판물'을 '가내수공업'으로 하다 보니 어찌어찌, 내지 디자인까지 맡게 됐다. 좀 어설프지만 인건비를 절약하려면 어쩔 수 없는 처사라고, 주인님이 말했다.


런데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이건 편집자 자아의 목소리가 분명하다.


글쓰기 자아: 무슨 일이야, 편집자?
편집자 자아: 망했어, 망했어.
글쓰기 자아: 왜왜?
편집자 자아: 아니, 판권지를 아예 까맣게 잊고 있었어.
글쓰기 자아: 그게 뭐야?




편집자 자아: 이런 걸 말해.
글쓰기 자아: 그게, 왜?그거 없으면 안 돼?
편집자 자아: 아니 남 말이라고 쉽게 하네. 그게 있어야 언제 발행한 책인지, 누가 펴냈고 편집했는지도 알 수 있지. 기본적인 정보인데... 게다가 거기에 독자에게 공지할 말들도 간략하게나마 넣을 수 있고.

글쓰기 자아: 아, 그런 거야?
편집자 자아: 앗. '일러두기'를 쓰려고 했었는데 그것도 잊고 있었네. 가제본 안 뽑았으면 큰일 날 뻔. 근데 넌 또 무슨 일인데? 여긴 왜 왔어?

글쓰기 자아: 자, 이거. 부탁 좀 해. 내가 에피소드를 좀 써 봤어. 그냥 뒤에서 세 번째쯤엔가, 거기에 슬쩍 추가만 해 줘. 별일은 아니야. 그리고 내가 가제본 확인해 보니까 쓸데없는 여백이 많더라. 그 여백도 좀 없애 주고. 오타 난 부분 꽤 있더라. 내가 가제본에 일일이 다 표시해 놨어. 얼마 안 돼. 180쪽이니까, 뭐 할 만하겠지? 아, 참. 여백에는 쪽번호 안 들어가게 깔끔히 처리해 주는 것도 잊지 말고!

편집자 자아: 아아아아악~~~~~~~~~


글쓰기 자아는 얼른 편집자의 독방을 탈출한다. '저 녀석, 히스테리가 보통이 아니다....'



<편집자 자아: 인디자인에서 자동으로 목차 생성하는 것도 이젠 잊어버렸다고, 페이지를 일일이 고쳐야 하고. 쪽번호 안 보이도록 만드는 것도 일일이 끌어다 옮기는 방법밖에 모른다고!>



글쓰기 자아는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성난 소리를 짐짓 모른 척한다. 아마도 편집자 자아의 막노동은 이제 막 시작인 듯하다. 글쓰기 자아는 자기 할 일은 끝났다는 듯 자신이 쓴 글을 신명 나게 브런치에 올려 버린다.


https://brunch.co.kr/@springpage/603


사람들이 괜히 '자동화, 자동화'하는 게 아니다. AI가 괜히 환영을 받는 게 아니다. 내 안의 편집자 자아는 인디자인 프로그램에 관한 스킬들이 부족해서 어제도 '인형 눈깔 붙이기' 느낌으로 일일이 목차와 쪽번호를 수정했다.


뭐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데 나의 편집자 자아,

내 덕(?)에 눈과 손이 고생이다. 그래도..



그래도 너의 막노동에 경의를 표한다.

그 덕에 나의 독립출판물이 서서히 완성도를 높여 가니까.


그리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않겄어? 힘내, 편집자 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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