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바람이 난다 (2)

by 봄남

이틀 전 지현은 체육 선생님과 커피숍에 갔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그는 지현씨가 생각났다며 선물을 건네주었다. 그녀가 늘 쓰던 빨간 볼펜이 있었다. 그녀는 지난번 채점을 하다 빨간 볼펜에 잉크가 떨어진 것을 생각해냈다. 눈이 동그래지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가 커피를 주문할 때 그녀는 그에게 평소에 아끼던 텀블러를 답례라도 하듯 불쑥 내밀었다.


“요새 환경 때문에 일회용 컵은 쓰지 말자는 의미에서…” 그녀는 무심한 듯 텀블러를 주었다.

“저 주시는 거예요?”

“네, 저도 볼펜 받았는데요 뭘. 전 하나 더 있어요.”

“감사합니다!” 그는 수줍게 웃으며 두 손으로 텀블러를 꼭 쥐었다.


그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그녀의 이야기를 주로 들어주었다. 그에겐 그녀의 남편보다 고상한 지식이 있거나 유머가 있지 않았다. 그녀의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면 그는 ‘젊음’을 빼면 그녀의 남편보다 매력적일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만남은 그녀에게 생활의 활력이 되는 강력한 힘을 주었다.


그녀는 퇴근 후 아이들에게 저녁밥을 먹이고 레고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즈음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아이들과 말을 태워주며 놀아주고 재웠다. 그녀는 아이들을 재우고 나오는 남편에게 괜히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는 퇴근하는 길에 사 온 곱창을 먹으려고 신이 나 있었다. 식탁에 마주 앉아 곱창을 막 먹으려고 하는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보, 나야? 곱창이야?”

“곱창”


주저하지 않는 그의 농담에 실소를 했다. 그녀를 최우선으로 두지 않는 농담이 거론될 만큼 그들의 관계는 탄탄한 믿음 위에 안정기를 지나고 있었다. 아니 적어도 남편에게는. 현재 그녀는 사랑받을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하나 더 있는 상황이라 불현듯 화가 났다. 지금 그러한 농담은 그녀에게 적절하지 않았다. 재미있어야 할 그들의 대화가 여차하면 감정의 단절을 불러올 만큼 치명적인 실수가 될지 남편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안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침대 위에 앉아서 외쳤다.

“나도 너가 아니라 볼펜이야! 볼펜이 더 좋아!”

"....... 볼펜?"


남편은 그녀가 지나간 안방 문을 얼마간 쳐다보다가 다시 곱창을 질겅질겅 씹었다.


그날 저녁 그녀는 체육 선생님을 향한 마음에 대한 죄책감을 남편에 대한 서운한 마음으로 상쇄시킬 수 있었을까. 체육 선생은 기회를 노리는 공격수처럼 때를 가리지 않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보고 싶어요.’


그녀는 체육 선생님을 향한 감정의 동요를 느꼈다. 그 이후 그들은 점점 자주 만나게 됐다.



그러나 스릴 넘치고 재밌을 줄 알았던 그들의 만남은 얼마 가지 않아 고통과 불안의 연속 선상 위에 있었다. 문제는 그녀가 연애의 감정을 느낄수록 그의 행동이 더 과감해진 것에 있었다. 그는 그녀의 사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다.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노골적이어서 연애에 예민한 주변 몇몇은 이미 눈치챈 모양이다.


“선생님, 요즘 좋은 일 있나 봐?”

지나가던 학교 직원이 실눈을 뜨며 말했다. 그녀는 학교에서 유명한 말쟁이다.

“아.. 아뇨..”

반사적으로 마음을 숨기고 싶었지만 그는 짧은 말에 모든 것을 드러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뭐 여하튼 조심해.”

그녀는 그를 응시하며 두 손가락으로 자기 눈과 체육 선생님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가리키면서 멀어졌다. 그는 그것이 응원의 말인지 잠시 헷갈렸다. 그녀의 말투에서 얼핏 화를 느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파악했으니 거짓말하지 말라 또는 숨기지 말라는 협박처럼 들린 건 그의 착각일 것이라고 스스로 일러두었다.


지현은 멀리서 그렇게 말하고 지나가는 교직원을 보고 아차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들은 쉬쉬하며 그녀를 평가하고 있었다. 이후로 그녀는 그에게 예전처럼 대할 수 없었다. 아니 쌀쌀맞게 대했다가 맞을 것이다. 그녀 스스로 도덕성에 흠을 내는 일에 수치심을 느꼈고 그 중심에는 바로 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애초에 그의 마음을 이용해 즐기거나 그를 농락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녀의 행동이 위선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녀가 누군가에게 외도의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해야 하는 거짓말이나 차가운 행동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한 마디로 피곤했다.


"여기선 아는 척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왜요? 싫어요."


그녀가 차갑게 대할수록 그는 더 집착했다. 갑자기 애정행각을 하거나 낯 간지러운 문자를 보냈다. 그가 그럴수록 지현은 그에게 화를 냈다. 그리고 거의 매일 그들은 다투고 화해하기를 반복했다. 그녀가 좋아하기로 선택한 그 남자는 그녀가 가장 숨기고 싶은 존재가 되었다.


체육 선생은 그녀의 불안해하는 모습에 더 깊은 애정을 느꼈다. 그녀가 자신을 거부할수록 그녀의 모습이 연약해 보였고 그럴 때면 더 안아 주고 싶었다. 그녀가 수업을 마치고 학교를 나서는 뒷모습을 보며 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우러러보는 아름다운 존재가 자신으로 인해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고통이자 알 수 없는 희열이었다. 마침 진동벨 소리에 핸드폰을 보았다. 화면에는 '내 사랑'이라고 쓰여 있었다.


"여보세요."

"오빠, 나 왔어."

"그래 나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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