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회
쨍그랑!
지현은 유리컵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이 멎는 듯했다. 남편이 와서 깨진 유리잔을 치우느라 분주했지만 지현은 한 곳을 응시한 채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 때보다 가정에 충실한 주말이었다. 마침 그녀의 막내 여동생이 오랜만에 온다고 해서 저녁상을 준비 중이었다. 남편과 아이들은 손님을 맞이할 생각에 들떠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일상의 여유였다. 체육 선생님에 대한 존재는 잠시 잊기로 했다. 그와의 연애는 생각보다 달콤하지 않았고 신경 쇠약에 이를 정도로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이미 받고 있는 비난과 수군거림은 그녀를 고통에 시달리게 했다.
마침내 초인종이 울리고 동생이 들어왔다. 그녀의 막내 동생인 수현은 그녀와 닮은 맑은 피부를 가졌으며 긴 생머리에 선한 눈을 가졌다. 물 한 잔 마시라며 유리컵에 시원한 물을 따라 수현에게 가져다주고 있을 때 수현이 의자에 앉아 가방에서 물건을 꺼내 식탁 위에 놓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눈을 의심했다. 동생이 들고 있었던 텀블러 때문이었다. 그녀가 체육 선생에게 선물해 주었던 리미티드 에디션 블루 텀블러가 그녀의 손에 있었다.
지현은 컵을 건네 주려다가 바닥에 떨어뜨렸다. 사색이 된 언니의 얼굴에 동생은 괜찮냐고 연신 물어봤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애써 추슬렀다. 동생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시선을 떨구고 급하게 화장실로 향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정리해 보려고 잠시 생각해 보며 크게 한 숨을 쉬었다. 그리고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랐다. 경직된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녀의 지나친 추측일 것이라고 주문을 외우듯 되뇌었다.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나와 저녁 식사를 이어갔다. 아까 먹은 라면이 급체한 것 같다고 둘러 댔다.
남편은 저녁을 먹으며 결혼할 남자 친구 이야기에 대해서 물어봤다. 그녀는 그가 자상하고 그녀밖에 모르며 세심하게 잘 챙겨주는 남자라고 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고 키도 크다고 했다. 지현은 소화가 되지 않았다. 물을 마시면서 동생 옆에 있는 텀블러를 응시했다.
“그 텀블러는 어디서 났어?”
“남자 친구 꺼야.”
“쓰던 거 막 주고 그러니?”
“우리 사이에 네 거 내 거가 어딨어.”
그녀는 그날 온통 아무렇지도 않은 척, 괜찮은 척, 축하해 주는 척에 에너지를 쏟느라 진이 다 빠져버렸다.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이 되었다. 그녀는 체육 선생과 처음 만났던 커피숍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다행히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코너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그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김수현을 알아?”
그는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화가 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알지.”
“내 동생이야.”
그는 눈동자를 떨구었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손에 땀이 찼다. 당황한 것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양손 주먹을 쥐고 무릎에 올려놓았다.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지만 어떤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의 다그치는 목소리가 숨통을 조여왔다. 그는 한 손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다음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원래 사귀던 여자가 있었어. 그런데 당신이 눈에 들어온 거야. 어쩔 수가 없었어.”
그녀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런데 그가 한 마디 덧붙이자 그녀는 아연했다.
“당신도 남편이 있잖아.”
‘뭐…. 뭐… 지?’
그의 표정은 이내 차가워졌다. 나름 평정을 되찾은 듯싶었다. 그의 태도는 마치 ‘어디 한 번 덤벼보라’는 식이었다.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 그녀는 무언가 역전당한 기분이었다.
“당신은 불륜을 저지르면서…. 나한테만 도덕성을 요구하는 거야… 설마?”
“그럼 우린.. 우린…무슨…”
“… 난 당신을 아직도 좋아해”
“……. 내 동생은?”
그녀는 기가 차서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순수한 마음을 이용해 먹은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그였다. 생각해 보니 그가 싱글이라고 단념한 건 그녀의 순진한 착각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역겨워졌다. 누가 더 양심이 없는지, 누가 더 상처를 줬는지는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침묵이 길게 이어지자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체육 선생은 유리창 밖으로 그녀가 한참을 서있는 것을 보았다. 집에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그녀는 손으로 핸드폰 화면을 아무렇게나 터치하며 한 곳을 응시했다. 그의 애원하는 눈빛이 눈앞에 서성거렸다. 그 눈빛 뒤에 있는 사악한 그림자를 눈치 채지 못한 그녀가 실로 어리석었다고 생각했다. 현기증이 났다. 그녀는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손잡이를 겨우 잡았다. 그녀가 그에게 느꼈던 분노의 크기만큼 본인도 ‘나쁜 년’이라는 사실이 느껴지자 구토할 것 같았다.
며칠 후, 학교는 겨울 방학을 시작했고 지현은 그 학교와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