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관: 좁은 곳(3)

by 이유진 봄해
무채색의 공간에 갇힌 것 같았다.


한 여름, 나는 가족들과 제주의 어느 빛 공연장을 찾았다. 다른 빛 공연장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공연을 관람하기 전, 이곳의 세계관을 소개하는 별도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세계관은 단순했다. 모든 색을 잃고, 흰색과 검은색의 명도로만 구분된 세상. 그 무채색의 공간에 사람들은 한데 모여 조용히 기다렸다. 작은 문이 열리면 줄을 지어 그 너머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문 뒤편은 바래진 풍경과는 전혀 다른, 다양한 빛이 춤추는 공간이었다.


빛을 잃은 그 공간에서, 나는 아이를 안고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기 직전, '쿵' 소리와 함께 모든 조명이 갑자기 꺼졌다. 공간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고, 가슴이 내려앉는 소리가 속에서 울렸다. 화재 현장의 그 순간이 떠올랐다.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아이를 안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도 돌아섰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이를 더 꼭 끌어안았다. 작은 볼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에 감각을 집중했다. 그때, 문 주위로 서서히 다양한 빛이 모여들며 퍼지기 시작했고, 곧 문이 열렸다. 그 순간, 다시 현실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심장의 두근거림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안으로 들어갔고, 나도 아이를 안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소방공무원은 일 년에 한 번, 전문 심리상담사의 상담을 받아야 했다. 사고 현장에서 겪는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로 힘들어하는 직원들이 의외로 많았다. 그래서 상담사가 직접 소방서를 찾아와 일대일 상담을 진행했다. 하지만 대개는 절차상의 과정일 뿐, 특별한 말이 오가지 않으면 금세 끝나곤 했다. 나 역시 매번 상담을 받았지만, 말할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때는 달랐다. 화재 현장에서의 내 반응, 일상 속에서 자주 느껴지던 심장의 두근거림과 갑작스러운 호흡 곤란. 그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날, 상담사가 센터를 찾았다. 내 순서가 되자 한쪽에 마련된 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눴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분은 진지하게 귀 기울여주었고, 도움이 되고 싶다며 추가 상담을 제안했다. 다만 다음 상담은 병원에서 받아야 했다. 병원 예약은 내가 직접 해야 했다. 전화를 걸자 상담 일정은 이미 가득 차 있었고, 한 달 뒤에야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한 달 후, 나는 병원을 찾았다. 대기석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분도 보였다. 내 차례가 되어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는 편안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지만, 그 분위기만큼은 쉽게 편해지지 않았다. 나는 화재 현장에서 겪은 일과 그전부터 일상에서 나타난 증상들을 차근히 말씀드렸다. 그분은 한 번 시작된 증상은 이후 더 심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물었다. "그래도 일을 계속해야 하니, 혹시 약 처방을 받아보시겠어요?" 나는 괜찮다고, 아직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씀드렸다.


나는 네 아이의 부모로 누군가의 하루를 지켜내는 일을 했다. 강해야 한다는 기대, 아프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을 자연스레 안고 살았는지 모른다. 약을 권유받았을 때, 괜찮아야 한다는 익숙한 마음이 먼저 앞섰다. 그날 병원 대기실의 풍경은 낯설고 혼란스러웠다. 상담사는 공감했고, 물어보는 말에 친절히 반응해 주었다. 하지만 그날 꺼낸 이야기들은 어딘가 해소되지 않은 채 머물러 있었다. 그래도 병원을 다녀온 이후, 내 마음은 조금 달라졌다. 공황장애를 처음 인지했을 때 떠올랐던 건 이상하다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건, 이해받지 못한 나를 바라보라는 말처럼 들렸다. 이상함이 아니라,


이해함이 필요했다.


keyword
이전 14화소방관: 좁은 곳(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