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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내가 잠복 고환이라니

by 아옹다옹하다

녀석들에게 좋은 날은 다 갔다. 바야흐로 중성화 수술의 시기가 도래했다. 6개월령 무렵 근처 동물병원에 전화를 해서 진료 예약을 했다. 이동 가방을 열자 고양이 두 마리가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신명나게 사뿐 뛰어들었다. 마치 돈가스 먹으러 가는 줄 알고 흥겹게 집을 나섰다가 표피를 잘려버린 수많은 남자아이들처럼. 의사 선생님이 진찰을 하더니 뜻밖에 비보를 날렸다. 다옹이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간단히 수술이 가능한데, 아옹이는 잠복 고환이라 배를 절개하는 개복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도대체 뭐가 숨었다는 거지.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고환이란 마땅히 바깥으로 노출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복강 내에 남아 있는 상태를 잠복 고환이라고 했다. 그대로 방치할 경우 종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꼭 제거 수술을 해야만 했다. 초음파로 고환의 위치를 찾아내야 하는데 의료 장비가 여의치 않으니 다른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결국 먼저 다옹이만 수술을 시키고 아옹이는 더 큰 병원에서 수술하기로 했다. 아픈 애한테 이런 말하면 안 되지만 아옹이 참 여러 가지 한다. 남들 하는 거 다 하려고 한다. 놈의 별명은 이제부터 잠복이다.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허튼 농담을 나누며 아내와 집으로 돌아왔다. 간단한 수술이라지만 배를 절개한다는 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수술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다옹이는 수술 부위가 아픈지 한동안 맥을 못 추고 누워만 있었다. 땅콩을 잃어버린 상실감 때문인지, 남성성을 빼앗겨 버린 박탈감 때문인지는 몰랐다. 잠복이는 자신의 미래를 예견하지 못한 채 해맑게 다옹이의 털을 핥아 주었다.


아옹이가 사라졌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출근하기 전 꼭 고양이의 위치를 확인했다. 보통 베란다, 화장실, 옷방과 서재의 문은 닫아 두고 집을 나섰다. 닫힌 공간 안에 가둬두고 나가면 안 되기 때문에 항상 녀석들이 어디 있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침대 밑에도, 소파 아래에도 없었다. 혹시 몰라 보일러실도 열어보고 현관 밖에까지 나가 보았다. 창문 밖으로 떨어진 건 아니니 실내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이 확실했다. 의심 가는 공간은 옷방뿐이었다. 옷에 털이 묻어 옷방은 항상 닫아 놓는데 잠깐 옷을 입을 때 따라 들어왔을 확률이 높았다. 여보, 아옹이 여기 있어! 잠시 후 아내가 폭소를 터뜨리며 아옹이 좀 보라고 했다. 녀석은 빼곡히 걸려 있는 옷 아래 자락에 은신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면 수술대 위에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직감이라도 한 걸까. 고환도 감추고 몸도 숨기고. 역시나 매복의 귀재, 잠복의 천재였다.


고양이는 아플 때 깊은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야생의 포식자들은 사냥할 때 무리 중 가장 약한 사냥감을 타깃으로 삼았다. 사냥에 성공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야생의 습성이 남아 있는 고양이는 본능적으로 몸이 약해지면 자신을 보호해 줄 안전한 장소를 찾았다. 다른 고양이나 주인이 보이지 않는 조용한 곳으로 몸을 숨겨 체력을 비축하고 회복하길 기다리는 것이다. 인간 또한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상처나 약점은 될 수 있으면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인간은 동물과는 다를 것 같지만 실은 더 야박하고 냉혹했다. 경쟁 사회에서 상대의 모자람은 내가 밟고 올라갈 수 있는 기회였다. 순박한 마음으로 자신을 다 보여주고 드러냈다가는 먹잇감이 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을 믿어 보고 싶었다. 매번 속으면서도 인간이 갖고 있는 품격과 선량한 마음에 자꾸 미련을 두었다. 치부를 드러내고 과거의 상처를 나눴을 때 오히려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포용하게 되는, 인간성이 갖는 어진 속성에 희망을 걸고 싶었다. 설령 배신당하고 부정당한다 할지라도. 몸이 아프면 숨어 들어가 쉬는 고양이가 있는 반면 오히려 사람 곁에 다가와 기대는 부류도 있었다. 상처와 아픔이 사람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고 믿는 고양이도 존재했다. 마치 우둔하고 미련한 나처럼.


의사 선생님이 아옹이의 수술 사진을 보여줬다. 복부 지방 층이 유독 두꺼워서 고환의 위치를 찾느라 진땀 뺐다고 했다. 역시 내 새끼! 그래도 수술은 잘 끝났다고 했다. 실로 조악하게 꿰맨 자국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상처 난 부위를 핥으면 염증이 생길 수 있어 확성기처럼 생긴 넥카라를 목에 채웠다. 이미 회복이 끝난 다옹이와도 잠시 격리해야만 했다. 다른 고양이가 상처 난 부위를 핥아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상처를 숨기는 것은 본능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료의 상처를 핥아 피냄새를 제거하고 포식자로부터 보호해 주는 것 또한 본능이었다. 한동안 병원에서 받아온 약을 먹이고 소독약을 발랐다. 아옹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회복할 것이다. 다시금 기운차고 늠름한 숨기의 대가, 말썽의 달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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