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코미디언
조용히 완전히 영원히 - 너드커넥션
안녕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오늘 날씨만큼 흐렸나요
화창하진 않았대도 자그만 행복이 깃들었길 바래요
나의 하루는 여느 밤과 같았어요 모든 게 미워지더니
그게 결국 다 후회가 되고 전부 다 내 탓이 돼버렸어요
삶이란 건 알다가도 모르겠죠 내가 많이 사랑했던 게
나의 목을 조르는 밧줄이 되더니 나를 매달고 싶대요
알아요 나도 수없이 해봤어요 노력이라는 걸 말예요
근데 가난한 나의 마음과 영혼이 이제 그만해도 된대요
안녕 마지막 인사가 되겠네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이제 다신 볼 수 없기에 자그만 행복을 남겨두고 가요
스스로를 갉아먹는 나의 밤이 날 다 먹어 치울 때쯤
난 당신의 기억 속에서 조용히 완전히 영원히 사라지길
https://youtu.be/W25_xvZWKMw?si=ydUDCHWPXW5z57Ag
그는 내가 알고 지내던 유일한 코미디언이었다. 그가 모임에 왔던 첫날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티브이에서만 보던 개그맨의 실물을 접한 그룹원들은 밝고 재치 넘치는 첫인사를 기대하며 수군거렸다. 그는 예상을 깨고 사람들 앞에서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수줍은 소녀처럼, 대인기피증이 있는 환자처럼 쭈뼛거리는 모습은 누가 봐도 정상의 범주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는 모습에서 학대당한 적 있는 강아지가 연상되어 맘이 아렸다. 그에게 관계라는 것은 일종의 장애와 같이 느껴졌다. 브라운관에서 접하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라서 다른 사람 같았다. 모임에서 만나기 전 공연장에서 그를 본 적이 있었다. 어느 개그 프로그램의 녹화 방송이 시작되기 전 그는 관객 앞에서 호응을 유도하며 바람잡이 역할을 했다. 뻔뻔하고 익살스러운 그의 꼬임에 관객들은 박수를 치며 즐겁게 휘둘렸다. 바람잡이는 입담이 세고 인지도가 높은 사람의 몫이었다. 동료와 함께 콤비를 이뤄 어딘가 모자란 듯하면서도 능글맞게 그려낸 풍자가 대박을 쳤다. 굳이 따지자면 파트너가 주인공이었고 그는 받쳐 주는 역할이었으나 그의 인기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개그를 총에 비유하자면 기관총보다는 저격총에 가까웠다. 자동으로 난사가 가능한 기관총처럼 쉬지 않고 떠들어대지는 않았지만 특유의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잠자코 있다가 한 번씩 툭툭 던지는 불의의 대사가 웃음을 유발했다. 단 한순간을 위해 몇 시간이고 숨죽이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 폭발력을 발휘해 사냥에 성공하는 맹수 같았다. 복선을 깔고 때를 기다리다가 가장 적절한 순간에 방아쇠를 당기는 그의 저격에 관객들은 배꼽을 잡고 쓰러졌다. 사람을 웃기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말과 행동의 내용이었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다 헛수고에 불과할 뿐이었다. 생에서 사람이 오고가는 것, 사건이 발생하고, 생각의 전환이 이뤄지는 것, 결국엔 알맞은 시기가 그 의미를 완성하기 마련이었다. 그의 또 다른 장점은 기발한 아이디어와 콩트 구상 능력이었다. 그래서 그는 여러 코너에 등장했다. 때로는 주연으로 때로는 조연으로 역할을 달리하며 한창 주가를 올렸다. 광고까지 찍으며 탄탄대로를 달릴 것 같았던 그가 돌연 선후배 간 폭행 사건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사건의 가해자가 되어 기사에 올라오더니 급기야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고 방송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물하던 그의 영상에 조롱하는 악플이 달리기 시작했다. 모자를 눌러쓰고 카메라 앞에서 사죄를 하던 것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그의 모습이었다.
리더 회의 때 그를 어떤 소그룹에 배치할 것인지 논의가 이루어졌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향을 고려하여 동성이면서 또래인 내가 맡기로 했다. 그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처음 데려온 K가 내 그룹원이기도 했다. 그는 어떤 질문을 해도 단답형으로 답을 하는 바람에 쉽게 생각을 읽기 힘들었다.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먼저 마음을 열고 나를 보여주었지만 좀처럼 감정 표현을 하지 않았다.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것처럼 일방통행이 계속되자 더이상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삼삼오오 떼를 지어 대화에 열중할 때 그는 핸드폰만 보았다. 다 같이 장소를 이동할 때도 혼자 걸었다. 홀로 걷는 뒷모습이 쓸쓸하게 느껴져 나란히 붙어 말을 걸었다. 그 영혼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기도 했다. 그는 일은 잠시 쉬면서 이른 저녁까지 남산도서관 열람실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가끔씩 그를 심방하기 위해 남산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누굴 위로하고 챙길 처지가 아니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지 2년이 넘어가면서 진퇴양난의 딜레마에 빠졌다. 내가 나를 모를까. 주어진 목표물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과녁 주위를 기웃거리는 스스로가 한심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미련 없이 포기하기엔 그간 쏟아부운 화살이 아까웠다. 집인 청파동에서 후암동 언덕길을 지나 남산도서관까지 걸으며 이랬다저랬다 하루에도 수십 번 생각이 바뀌었다. 남산 타워 아래 목적지가 한눈에 들어왔지만 가파른 계단은 올라도 올라도 끝이 없었다. 존재의 가벼움과 하찮음을 인지할수록 스스로를 원망하게 되어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공부하다 지루할 때면 그의 책상 앞에 메모를 적은 포스트잇을 붙였다. '형, 자판기 커피 고고.' 그의 책상 위에는 신앙 서적과 성경이 펼쳐져 있었다.
비록 시간이 걸렸지만 한 살 터울인 나를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너 혹시 평소에 웃기다는 얘기 들어 봤어? 소질이 보이는데." "웃기게 생겼다는 소리는 자주 들어 봤죠. 남을 웃기는 비법 좀 알려 주세요." 말이 나온 김에 그에게 물었다. "비법이 어디 있어. 그냥 타고나는 거지. 웃기게 생긴 네 얼굴처럼." "형, 집에 거울 없어요?" 대학생 때 후배들을 웃기기 위해 앞니에 김을 묻히고 다니던 시절 얘기를 그에게 해주었다. 그는 소극장에서 공연할 때 바보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멀쩡한 생니를 뺀 적도 있다고 했다. 중학교 때 짝사랑하는 여자애를 농담으로 웃게 만든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코미디언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형, 저는 코미디언이라는 직업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인간 내면 깊은 곳에 감춰져 있는 슬픔까지 이해할 줄 알아야 남을 웃길 수 있는 법이잖아요." 그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우물에서 물을 기를 때 바닥 깊은 곳에 있는 물을 뜨잖아요. 사람의 마음도 표면에는 원초적이고 이기적인 열망이, 아래쪽에는 내적 욕망과 성숙한 마음이 존재한단 말이에요. 남을 웃기는 건 심연 깊은 곳에 있는 물을 퍼 올리는 일이에요." "멋진 말이네...... 너 혹시......" 잠시 뜸을 들이다 그가 무겁게 입을 떼었다. "어떻게 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지 알아?" 섣부른 추측이지만 그도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자책에 시달리는 중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용서받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한동안 빠지지 않고 모임에 나오던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 연락을 해도 받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산도서관 열람실을 찾았지만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가끔씩 생각이 날 때마다 인터넷으로 그의 기사를 검색해 보았다. 그는 재기해서 공개 방송의 한 코너를 시작했다. 2~3주 신선하다는 호평이 올라왔으나 이내 악플로 도배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K로부터 그의 편지를 전해 받았다.
개그에 소질이 있는 나의 리더에게.
연락 못 해서 미안해. 연락을 받으면 의사 표시를 하고 물음에 답을 하는 것이 당연한데, 언젠가부터 세상과 쌍방 통행이 되질 않아. 피드백이 되질 않으니까 나라는 장치가 잘 작동하는지 알 수가 없고. 적지 않은 밤을 회개로 지새웠어. 네가 말한 것처럼 나를 용서하려고 해 봤는데 그게 잘 안 돼. 모든 것을 망쳐 버린 내가 한심해서, 극복해야 되는 현실이 감당이 안 돼서 자꾸 포기하게 돼. 십 년 넘게 하나의 꿈만 꾸며 달려왔어. 그걸 그만둬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아쉬움보다 안도감이 더 크더라. 아슬아슬한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나 봐. 전장에서 퇴각한다고 생각하니 다시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현실에 안심부터 돼. 패배감 따위는 대수롭지 않아. 생존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지. 걱정하지 마. 대중 앞에 서지 않을 뿐이지 우물 깊은 곳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일은 계속할 테니까. 참, 그때 물어본 나만의 개그 비법을 알려줄게. 남을 웃길 때 절대 먼저 감정을 드러내지 마. 준비한 대사를 마치기 전까지 시치미를 떼고 너만의 연기를 이어나가야 해. 염치없이 뻔뻔할수록 남을 웃기기 수월하단다. 삶을 버티는 것도. 너랑 도서관에서 마시던 자판기 커피 맛이 그리워. 기도해 줘서, 안부를 물어봐 줘서 고마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