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옹다옹하다 May 18. 2024

속아도 꿈결

노루와 천적

속아도 꿈결 - 가을방학


산책이라고 함은 정해진 목적 없이

얽매인 데 없이 발길 가는 대로 갈 것


누굴 만난다든지 어딜 들른다든지

별렀던 일 없이 줄을 끌러 놓고 가야만 하는 것


인생에 속은 채 인생을 속인 채 계절의 힘에 놀란 채

밤낮도 잊은 채 지갑도 잊은 채 짝 안 맞는 양말로


산책길을 떠남에 으뜸 가는 순간은

멋진 책을 읽다 맨 끝장을 덮는 그 때


인생에 속은 채 인생을 속인 채 계절의 힘에 놀란 채

밤낮도 잊은 채 지갑도 잊은 채 짝 안 맞는 양말로


산책길을 떠남에 으뜸 가는 순간은

멋진 책을 읽다 맨 끝장을 덮는 그 때

이를테면 봉별기의 마지막 장처럼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 굽이 뜨내기 世上


그늘진 心情에 불 질러 버려라'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https://youtu.be/VSMEBctRRqk?si=TtKqeD1xZYTL28cn



 고통으로 근심을 지우는 것이 가능할까.


 몸담고 있는 직장에서 전 직원 제주도 연수가 진행되었다. 오월 근로자의 날을 맞은 연례행사였다. 휴일을 하루씩 끼고 이박 삼일, 네 개 조로 나누어 교대로 연수가 시작되었다. 각각 사십 명 내외로 이루어진 네 개의 그룹에는 조장이 한 명, 총무가 한 명 필요했는데, 내게 총무 역할이 맡겨졌다. "나 좀 빼 주면 안 돼? 사람들 챙길 여력이 없는데." 일정을 짜고 그룹을 편성한 경영지원실 직원들에게 전화해 사정을 이야기했다. 십 년 넘게 나를 지켜보았던 동료들의 평가가 고맙고, 기대에 부응하고 싶으면서도 쉽사리 승낙할 수 없었다. 무력(無力) 상태에 빠졌다. 온통 근심과 비관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글도 쓸 수 없었다. 누구의 말에도 귀기울일 수 없었고 은은한 미소도 짓기 힘들었다. 세상을 향해 작은 선의를 품기 어려웠다. 아픔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말이 더디고 조심스러운 이유를 알게 되자 내 말도 잘게 토막이 났다. 표정 관리 할 새 없이 무방비 상태에서 찍힌 사진 속 얼굴은 끔찍할 정도로 어두웠다. 일이 문제였을까, 사람이 문제였을까. 업무라는 조건을 고정해 놓고 사람을 변수로 대입해 보았다. 상황은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분석되고 각기 다른 대응이 이루어졌다. 결국 상태을 만들고 통제하는 주체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감쪽같이 사라진다면 앓던 이가 빠지는 것처럼 시름도 없어질까. 애초부터 그들은 어디에나 있는 존재이며 나약한 내가 문제였던 것은 아닐까. 처한 상황과 해결해야 될 문제를 떠올리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안이 엄습해 왔다. 심장이 강하게 뛰고 숨쉬기가 버거워 공황 장애가 온 것은 아닌지 걱정될 정도였다. 염려해 봤자 해결되는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올무에 걸린 유약한 짐승처럼, 맹수 앞에 놓인 하위 포식자처럼 겨우 가뿐 숨만 거칠게 내쉴 뿐이었다. 제주도에 함께 가는 조원들의 명단을 펼쳐 놓고 한 명 한 명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다행히 유별난 사람은 없고 내향적인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어쩐지 정적이고 조용한 분위기가 그려졌다. 현지 가이드가 인원 체크와 카드 결제까지 다 하기 때문에 총무로서 할 일은 많지 않을 거라고 했다. 혹시라도 제주도에 가면 회사와 관련된 일은 잠시 잊을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품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첫날 맞이한 것은 차귀도의 탁 트인 풍경과 시원한 바람이었다. 마을에서 배로 십여 분 걸리는 곳에 위치한 차귀도는 제주도에 딸린 무인도였다. 깍아지는 듯한 해안 절벽과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루고 섬 중앙은 평지 형태였다. 바다 쪽으로 해상 풍력 단지가 조성되어 있어 풍차를 볼 수 있었다. 아무 노력하지 않아도 바람이 밀어주어 저절로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풍차가 부러웠다.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며 풍차처럼 팔을 빙빙 돌려 보았다. 처음 보는 수목과 식물이 눈을 즐겁게 했다. 육지로 돌아가는 선상에서 우연히 여섯 마리쯤 되는 돌고래 무리를 발견했다. 돌고래는 수면 위로 매끈한 몸을 드러내며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배에서 멀어지는 돌고래에게 인사하며 제주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 날 오전 일정은 한라산 영실 코스와 올레 5코스 중 택일할 수 있었다. 영실 코스는 백록담까지 가는 코스에 비하면 짧고 오르기 수월했다. 등정 난이도는 낮았지만 윗세오름까지의 경치는 절경으로 유명했다. 한라산 영실 코스 지원자인 남직원 아홉 명과 여직원 한 명을 인솔해서 등반을 시작했다. 진작부터 한라산에 오를 셈이었다. 장엄한 병풍 바위를 배경으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어수선한 생각을 정리할 작정이었다. 초입부 푸르른 숲길이 형성한 자연 그늘이 서늘한 바람을 선물했다. 동료들과 무리를 이뤄 잡담을 나누며 여유 있게 걸었다. 하지만 햇볕이 드는 가파른 계단길에 들어서자 호흡이 거칠어졌다. 직원들이 서서히 처지기 시작했다. "경치 감상하면서 천천히 갈 테니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먼저 올라가세요." 이번 등반의 유일한 여직원이자 이십 대인 K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대열의 선두에서 연신 뒤를 돌아보다 어느 순간 비로소 혼자만의 구보에 이르렀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지만 쉬지 않고 더 거칠게 몰아붙였다. 극한의 고통으로 인해 잡생각이 사라질 때까지, 근심에서 해방될 때까지 그렇게 무거운 걸음을 내딛었다. 털진달래와 철쭉이 피어 있는 평탄한 데크길이 시작되고 저 멀리 세 개의 오름과 한라산 분화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루샘에서 잠시 발길을 멈춰 시원한 샘물을 마시는데 동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풍경 사진 많이 찍었어?" 마지막으로 합류한 K에게 누군가 말했다. "아니요. 눈에다만 실컷 담았어요." "짝꿍 하나 데려오지 왜 혼자만 왔어?" "어차피 내려갈 거 뭐 하러 힘들게 올라가냐던데요." "어차피 똥으로 나올 거 밥은 왜 먹냐고 물어보지." "어, 노루다." 다 같이 한바탕 웃는데 K가 언덕 위 노루 한쌍을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돌고래에 까마귀, 노루까지 보다니 횡재했네요." "여기 사는 노루는 좋겠다. 천적도 없고 먹을 것도 지천이라서." 내내 싱글싱글하는 K를 향해 던진 말이었다. "천적이 없으면 좋을 것 같지만 오히려 생태계를 망가뜨려요. 사람도 적당한 자극이 있어야 건강해지는 법이잖아요." "어쭈, 제법 도사 같은 얘기를 하네." 아직 서른도 안 된 여자애가 꽤나 강단 있어 보이는 이야기를 하니 사람이 다르게 보였다.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어리목 코스로 하산했다. 하늘과 육지,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음의 갈증이 조금은 해갈되는 것 같았다. 산을 내려가면서 K가 했던 말을 되뇌어 보았다. 그렇다면 노루의 삶을 인정하면서 늘 불안과 경계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인지. 노루의 포식자인 어느 육식동물도 사냥하지 못해 굶어 죽을 걱정 속에 사는 것은 아닌지. 결국 거대한 생의 쳇바퀴 안에서 쉴 틈 없이 달려야 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둘째 날 저녁 식사 자리, 다소 빠듯한 일정으로 지친 심신을 달래기라도 하는 듯 술잔이 마구 오고갔다. 총무 보느라 수고했다며 따라준 조원들의 술을 몇 잔 마셨더니 머리가 핑 돌았다. 식사를 마치고 거나해진 술기운을 앞세워 노래방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누가 내향인들은 잘 못 논다고 했던가. 다들 준비라도 해온 듯 댄스곡이나 트로트를 멋들어지게 불렀다. K가 옆으로 와 수고했다며 소맥을 한 잔 말아 줬다. "엄청 꼼꼼하시던데요. 고생 많이 하셨어요." "고생은 무슨. 누구나 다 하는 건데." "안 해본 사람은 남을 섬기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그래서 수고했다는 말도 할 줄 모르죠. 자, 그럼 총무님도 한 곡 하셔야죠." K가 노래방 리모컨을 건네주었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사랑은 또 왜 이래.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형."


 

이전 03화 조용히 완전히 영원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