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첫 자가, 서울 양천구 신정동 아파트
우리 부모님은 강서구 화곡동 언덕배기 빌라에서 4년 반을 거주했다. 2년은 외갓집과 같은 빌라에서, 그 후 2년은 바로 옆의 다른 빌라에서 전세를 살았다.
부모님의 첫 신혼집도 거주여건이 아주 좋지는 않았지만, 두번째 집의 상태는 조금 더 심각했다. 집 뒤에 산이 있어서 습하고 벌레가 많았고, 서향 집이라 여름철 낮에는 집 안이 불구덩이처럼 더웠다고 한다.
그 집에서 내 동생이 태어났는데, 하필 동생이 태어난 해는 지금까지도 덥다고 회자되는 1994년이었다. 어른들에게는 '김일성이 죽었던 그 여름? 정말 더웠지'로 회자되는 그 해 말이다.
신생아인 동생이 더워 죽을까봐 우리 부모님은 에어컨을 샀다고 한다. 지금도 에어컨이 200만원 정도 하는데, 그 때 에어컨을 300만원 주고 샀다고 하니 지금 물가로 환산해보면 소형차 한 대 값 정도 쓴게 아닐까 싶다. 집도 차도 없이 언덕배기 빌라에 전세로 사는 신세에 그리 거금을 내고 에어컨을 살 정도라니, 얼마나 더웠던걸까 싶다. 산 아래 있는 집이라 벌레가 많아, 만 0세였던 내 동생은 바닥을 기어다니다가 바퀴벌레를 먹은 적도 있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이 결혼했던 1990년은 88올림픽 직후 집값이 미친듯이 오르던 시기다. 언젠가 내가 동생에게 '우리가 세 살만 많았으면 좋았을텐데, 그럼 집값이 덜 올랐을 때 내가 집을 사고, 너에게도 사라고 권하지 않았을까?'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들었던 아빠는 '내가 30살 쯤에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 때 집값 오르는 건 지금(2020년대 초 코로나 시기)에 비할 정도가 아니었지.' 라고 말했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양천구 신정동에 있는 조합 아파트를 계약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홀로 아파트지만 목동신시가지단지와 붙어있어, 목동 단지와 학군을 공유하는 아파트였다.
내가 태어난지 3년 지난 어느날, 그 아파트가 다 지어졌다. 다니던 어린이집에서 내 생일파티를 하고 이사를 갔던 것이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인생 첫 번째 기억이다.
우리 아빠는 대출 알레르기가 매우 심한 사람이며 (이 부분이 우리 집의 재테크 역사에 미친 영향이 매우 크므로, 뒤에 다시 언급할 예정이다) 또 목표가 생기면 그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사람이다.
집에 입주하며 생긴 우리 아빠의 목표는 주택담보대출을 최대한 빨리 갚는 것이었어서, 한동안은 월급날 전날에 우리 자매가 과자를 사달라고 하면 돈이 없어 난감할 정도로 빠듯하게 살았다고 한다.
비록 대출을 많이 받아 입주했기에 한참 쪼들려 살았다지만, 내 집이 주는 기쁨이 대출이 주는 압박감보다 훨씬 컸으리라.
90년대 초반 입주한 복도식 아파트. 그 이후로 늘 이보다 더 좋은 집에 거주하게 되었지만, 우리 엄마는 그 집에 살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남향이라 항상 햇볕이 잘 드는게 좋았고, 겨울에도 반팔만 입고 있어도 될 정도로 집이 따뜻하고, 수도꼭지를 열면 따뜻한 물이 콸콸 나와서 좋았다고 한다.
또 그 아파트는 어느 시중은행의 조합 아파트여서 그 은행에 다니는 분들이 많이 살았다. 30대 은행원인 아빠와 그의 자녀인 내 또래 아이들이 많이 살던 아파트. 또래 친구들과 복도를 뛰어다니며, 놀이터를 누비며 즐겁게 놀던 기억이 내게도 남아있다. 지금도 30대 부모들이 신도시 신축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유겠지. 깨끗한 새 아파트, 그리고 비슷한 또래들이 많은 곳.
그곳에서 4년 8개월을 살았다. 이유는? 그 집에서 동생이 한명 더 태어났기 때문이다. 5인 가족에게 33평 방 세개짜리 아파트는 너무 좁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