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ne Jun 30. 2024

서울시 강서구 화곡동 언덕배기 빌라 전셋집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이 이 세상의 평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보통은 내 주변에도 나와 비슷한 사람들만 모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랬다. 스물 일곱, 여덟살까지도 우리 집이 지극히 평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20대 후반에 접어들고 친구들의 부모님들이 한 두분씩 은퇴를 시작하자, 그제야 우리 부모님의 재테크 성적이 내 생각보다 많이 상위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울 요지에 빚 없는 자가 아파트, 그리고 연금과 금융자산이 있는 집. 그래서 부모님의 노후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집은 생각보다 흔치 않았다.


서울의 중위 아파트 가격이 11억원이 된 요즘도 여전히 가계순자산 10억이 넘는 집은 10% 남짓밖에 되지 않으니, '30년간 열심히 일했는데 서울에 빚 없이 집 한채 달랑 남았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전국 상위 10%인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우리 부모님은 전혀 부자같지 않다. 엄마 나이 60살이 되어 구입한 100만원대 초반의 구찌 가방 이전에는 명품 가방 하나 없었고, 두 분 다 10년 넘은 국산차를 타고 다니신다. 옷차림도 소탈하고 외식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마도 큰 이변이 없으면 은퇴하고 나서도 돌아가실 때까지 현재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아마 평균 올려치기의 나라인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그리고 꿈꾸는 '평범함'일 것 같다.


그래서 이 시리즈를 써보기로 했다. 30여년 전 양가 부모님 도움 전혀 없이 시작한 부부가 아이 셋 낳아 키우며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자산을 이루었는지, 내가 살아온 집들과 함께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내가 태어난 집이자 우리 부모님의 신혼집은 서울시 강서구 화곡동 언덕배기에 위치한 빌라였다. 30여년 동안 옆 동네 우장산과 허허벌판이던 마곡에 새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가양동과 등촌동에는 9호선이 들어섰지만 로드뷰를 보니 우리가 살았던 집 근처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습이다.



서울에 있는 방 3개짜리 집이 지금도 전세가가 2억원(이것도 최근에 전세난이라 호가가 좀 오른 것이다)이 될락말락하니, 위치와 집의 컨디션이 어떨지는 독자분들이 짐작하셔라.


참고로 강남이라던가 광화문 근처라던가 하는 서울 요지에서는 원룸 오피스텔 전세도 저 돈으로 구하기 쉽지 않고, 멀리 갈 것 없이 같은 강서구 내인 가양동의 25년 넘은 아파트 15평형(방 1개)짜리도 전세 2억 5천만원이 넘는다.


우리 부모님이 이곳에 살게 된 이유는 우리 외조부모님이 이곳에 자리를 잡으셨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은 초등학교 동창으로, 지방 소도시의 '읍' 출신이다. 친조부모님은 아직도 그곳에 살고 계시지만 외조부모님은 이런저런 이유로 막내딸인 우리 엄마가 대학에 입학하던 1981년에 서울로 상경하셨고, 우연히 강서구 화곡동에 터를 잡으셨다.


요즘도 부모님 댁 근처에 신혼집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듯, 우리 부모님도 자연스레 외갓댁과 같은 빌라에 신혼집을 구하게 되었다. 양가로부터 금전적인 도움을 받을 형편이 못 되었으니 어차피 이곳보다 입지가 좋은(평지라거나 지하철 역세권이라거나) 곳에 집을 구할 수도 없었다.


서울 지하철 5호선은 1995년에 개통되었으니, 우리 부모님의 신혼 시절에는 9호선은 커녕 5호선도 없었다. 즉 강서구에는 지하철이 다니지 않았을 때다. 엄마와 아빠 모두 언덕에서 내려가 대로변에서 버스를 타고 출근했고, 퇴근 길에는 등산을 해야 했다.


결혼한지 1년 반만에 내가 태어났는데, 하필 새벽에 진통이 왔다고 한다. 요즘처럼 카카오택시가 있는 것도 아니니 언덕배기에 있는 집에서 새벽에 택시를 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엄마는 만삭의 몸으로 언덕을 걸어 내려와 대로변의 산부인과에서 나를 낳았다고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