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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ysu Oct 11. 2020

타인은 남이 아니다.

<타인의 삶>

  유튜버 사슴님의 라이브를 봤다. 재밌게 봤다는 영화가 <타인의 삶>이라는 말에 대학생 때 썼던 글이 생각났다. 어떤 문법이나 세세한 의견에 얽매이지 않은, 즉, PC(Political Correctness)같은 규칙성에 얽매이지 않은 피드백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교수님의 'gut!', 'gut!', 'Sehr gut!'이 새겨져 있는 하얀 종이가 무지개만큼 다채로워보였다. 그때 교수님께 존경의 마음을 담아,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 글을 브런치에 새긴다.



*본 글은 대학생 시절 쓴 글입니다.  









  타인의 삶, 이 영화는 관찰자의 입장에서의 상대방을 향한 감정이입이 목적인 것 마냥 연출되었다. 보는 관객의 시각, 청각을 이용한 감각을 자극시키고 우리도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 같이 감시하고, 냉소적이었다가, 감동받고, 외롭고, 충격을 받으며, 서서히 타인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나는 시각의 면에서 어떻게 우리가 주인공과 같은 입장이 될 수 있나, 감정 이입을 할 수 있었나를 보았다.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빛과 카메라 구도, 그리고 움직임이다.

   첫째, 빛은 우리의 평소 일상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우리는 밤에도 앞을 충분히 볼 수 있다. 야맹증이 있지 않는 이상은 어둠에 익숙해지는 능력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음에도 빛을 갈망한다. 빛이 우리에겐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초반에선 빛에 대해 희소성을 가지고 있다. 비즐러가 강의를 하는 순간에도, 취조하는 순간, 연극이 시작되기 전 그루비츠와 대화를 할 때에도 빛은 한쪽에서 비치거나 전등 하나만이 방을 밝힐 뿐 이다. 크리스타의 연극을 보기 전까진 말이다. 그녀는 밝은 무대 위에서 웃었다가, 화냈다가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가, 등등 활기 있는 모습을 보인다. 그녀의 주위가 지나치게 밝지 않았음에도 비즐러와 어둠에 익숙해졌던 나의 눈은 그녀의 빛을 더욱 밝게 느꼈다. 이로 인해 크리스타에 대해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다시 그루비츠와 햄프 장관의 은밀한 대화 장면에서 돌아온 빛의 희소성은 더욱 불안한 감정을 들게 했다. 그리고 연극 후의 비즐러에겐 한 쪽에서 빛을 받고 있을 뿐이다. 그녀를 보았음에도 여전히 그의 생각은 뚜렷하게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음을 느꼈다. 아직은 크리스타만이 밝게 빛날 뿐이지 그의 이념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비즐러가 나오는 장면에서의 빛의 채도는 어두운 색이다. 게오르그와 크리스타가 춤을 추는 장면에서의 채도는 따뜻하고 밝은 것이 느껴지도록 역광이 없었는데, 그루비츠와 햄프 장관의 은밀한 대화 장면에서는 역광이 심했고, 비즐러가 그루비츠와 차안에서 대화하는 장면이나 그의 집, 그리고 도청 장소에서는 아주 적은 양의 빛이 그들의 얼굴 정도를 비출 뿐이었고, 비즐러가 더욱 외롭고 차갑게 느껴졌다. 여하튼, 그는 초반에는 매우 차가운 사람이었고, 그가 가는 곳들을 우리는 그 광경을 보았다. 이것으로 우리도 함께 기분이 차분해지고, 자신들의 이성에 좀 더 집중하는 냉소적인 인물이 될 수 있는 받침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초반의 비즐러가 비인간적인 사람이고 나 자신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쉽게 공감하고 같이 아파하는 인간적인 사람임을 알면서도 게오르그의 첫인상에 건방져 보인다는 비즐러의 말에 공감하고 만 것은 통해 우리의 감정이 빛을 조절함에 따라 분위기를 느끼고 같은 기분이 된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비단 비즐러의 감정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아이들과 축구를 할 때나, 크리스타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가지는 게오르그의 감정에 따라 밝아지는 빛이 우리의 기분을 한껏 따뜻하게 했다가, 예르스카와 대화할 때 한쪽에서만 비춰 그림자 지는 그의 얼굴, 예르스카의 활동 금지에 게오르그 자신도 따라 비통해진 기분으로 돌아온 집은 어둡다. 하지만 크리스타만은 밝게 빛나며 그를 위로해주고 응원해주는 모습에 나도 따라 용기를 얻기도 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놀랍게도 주요 인물들뿐만 아니라 조연에 대해서도 감정에 대한 표현이 섬세하다. 비즐러에게 협박당한 이웃집 아주머니의 얼굴에도, 활동 금지를 당한 예르스카의 얼굴에도, 슈바이버에게 화난 파울도, 당황한 슈바이버, 크리스타에 대한 사악한 욕망을 가진 햄프 장관, 심지어 햄프 장관의 비서까지 그들에게 비추는 빛은 각각의 인물의 감정에 따라 섬세하게 조절되었다. 이 영화에서 존재감이 없는 인물, 감정선을 알 수 없는 인물이 하나도 없는 이유는 아닐까 싶다.

 두 번째는 카메라 구도 및 움직임이다. 나는 초반에 비즐러의 협박 장면에서 약간 로우 앵글에서 잡히고 내 머리 위를 지나 상대방을 보고 있는 그의 형형한 눈빛에 위압감을 느끼면서도 취조당하는 인물에게 큰 동정을 느끼지 못했다. 비즐러는 책상 바로 앞에서 보듯 가까웠고, 상대방은 비즐러보다는 약간 먼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취조당하는 인물이 우는 장면부터는 더 이상 비즐러의 편에 선다는 느낌이 없었다. 그는 냉정하고 위압적인 인물이었다. 취조당하는 인물의 피곤한 얼굴이 클로즈업이 되고 가족을 이용해 협박하는 비즐러의 말에 좌절한 그의 얼굴이 아까보다는 가깝게 느껴지면서 안타까움을 가지게 되었다. 비즐러의 위압감을 마음에 품고, 연극을 보는 그의 시선을 따라 가듯 위에서 연극을 보는 게오르그, 연극하는 크리스타,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그루비츠와 햄프 장관의 모습이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걸 보면서 그는 더 이상 단순한 위압감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위압감 있으며, 냉정한 감시자였고, 나도 또한 감시자의 입장에 한발 정도는 내딛게 되었다. 하지만 영화 속에 빠지고 공감하면서도 순간 깨닫게 되는 이질감이 있었는데 그루비츠와 차안에서 대화 이후 집으로 걸어 들어가는 비즐러와는 다르게 멀어져가는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나는 그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게오르그를 도청함으로써 변화되어가는 비즐러의 감시자일 뿐이지 공감을 할 수는 있지만 비즐러처럼 비인간적인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도록 하기 위해 비즐러를 따라 가는 움직임이 아닌 그와는 멀어지는 카메라의 움직임을 보여준 것 같았다. 하지만 곧 그에게 감정이입하게 되며 변화를 느끼는 순간들이 서서히 오는데, 충실한 감시자이자 보고자, 국가에 해가 끼치는 인물을 배제하기 위해 도청하는 그가 햄프 장관을 모른 척 해달라는 그루비츠의 말에서부터 호네커 총리에 대해 조롱하며 농담하는 그루비츠의 모습에까지 비즐러는 그루비츠와는 조금 더 가까운 미디움 클로즈업으로 잡힌다. 그는 이상함을 느끼고, 그루비츠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모습을 나도 강하게 느끼는 것이다. 게오르그가 처음엔 의심스러웠지만, 정말 게오르그가 국가에 반하는 행동을 하기 때문일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증명이라도 하듯이 당황하는 크리스타와 차의 윗부분과 목소리만 들리는 햄프 장관, 슬퍼하는 크리스타를 안아주는 게오르그의 모습에 함께 안타까워했고, 그들의 모습 위로 겹치는 비즐러의 슬픈 얼굴이 그리 놀랍지 않았다. 도청하며 감정이입하는 그의 모습이 나와 같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외로움을 잠시 느꼈고, 게오르그의 집에서의 비즐러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카메라 덕분에 더욱 외로운 감정에 더욱 몰입하였다. 그리고 브레히트 시집을 읽는 비즐러의 모습은 그에게 인간적으로 변화하는 그를 응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무적이고 위압적이며 냉정하고 비인간적이었던 그를 무릎을 꿇고 올려다보는 듯 로우 앵글에서 잡혔지만, 소파에서 시집을 읽는 그는 편히 누워있었고, 감상에 젖은 그의 곁에 소파에 같이 앉아 내려다보는 것처럼 하이 앵글에서 잡혀 더욱 친근해지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온 것이다.

 인간적으로 변해가는 비즐러가 피아노를 듣게 되었을 때, 카메라가 움직인다. 천천히 트레블링 쇼트를 하며 슬퍼하는 그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또 나에게도 와 닿게 해주었다. 그의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이와 함께 좁은 엘리베이터에 아이가 국가보안국에 대해 부정적인 대답을 할때도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그는 더 이상 로우 앵글에서 잡히고 있지 않다. 이제 그는 우리와 같이 인간적이고 친근한 사람으로 변한 것이다.

 

  이처럼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은 비즐러의 감정 뿐 만이 아니다. 활동금지로 인해 박탈감과 상실감으로 흔들리는 예르스카의 모습 위로 흔들리는 게오르그의 담배연기가 겹쳐 예르스카를 위태롭게 보이게하고, 크리스타와 게오르그가 다툴 때 크리스타가 “맞아요, 필요없어요. 이런 스캔들도 필요없죠.” 하는 부분부터 서서히 크리스타를 향해 가까워지는 카메라 덕에 우리는 천천히, 그리고 깊숙이 크리스타의 사랑과 슬픔의 감정에 몰입하게 된다. 또 비즐러와 대화하는 크리스타의 모습을 미디엄 클로즈업으로 잡아 그녀의 슬픔과 갈등에 동정을 느끼고, 비즐러를 향해 충고를 날린다며 담배를 피는 그루비츠의 모습, 취조당하는 크리스타의 당황하는 표정, 허탈한 웃음을 날리는 모습 등을 미디엄 클로즈업보다 좀 더 가깝게 잡아 나조차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런 카메라의 구도들, 움직임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기 쉽고 이입하기 쉽게 했고, 타인의 삶에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타인의 삶이란, 우리가 관찰자에 입장에 서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 타인이 나와는 상관이 없는 남이라는 뜻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고 감정을 공유하고 이입하는 상대방이라는 뜻의 타인의 삶이라고 느끼게 된 것은 이 영화의 이런 섬세함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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