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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k 록 Mar 10. 2016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 없이 걷기

해야 하는 것을 하지 않을 자유

바르셀로나에 가면 ooo지! xxx

파리에서는 에펠탑 당연히 봐야지. 뉴욕에 갔는데 거길 안 갔다고? 뭘 보고 온 거야. 뭐? 그걸 안 먹었어? 대체 뭐 먹고 온 거야.

oo 하지 않으면 oo에 갔다 왔다고 말할 수 없다 

어디로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먼저 갔다 온 사람들은 내가 묻기도 전에 충고를 하곤 한다. 어디로 여행을 다녀왔다고 하면 자신의 경험과 비교하면서 틀린 점을 지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해보면 좋겠다는 권유가 아닌 꼭 해야 만한다는 강요가 섞인 그 말이 나는 불편하다.


한가로운 호스텔과 그 앞 해변
계획은 없어

바르셀로나 경찰을 만난 후 하루가 지나자 또 다른 해가 떠오르듯 맑은 정신이 떠올랐다. 다행히도. D와 조식을 먹고 나가자마자 있는 해변을 천천히 걷는다.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햇빛이 따가울 만큼 강렬하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펼쳐진 해변과 바다는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준다. 자전거를 타고 내달리고 싶은 날씨지만 다시는 스페인 경찰과 마주하고 싶지 않아 자전거는 깨끗하게 포기했다. 대신 걷다가 메트로를 타기로 한다. 어디로 간다는 계획 따위는 우리에게 없다.

Port Vell에 열린 마켓


계획 없이 걷다가 우리는 얼마 가지 않아 해변가에 열린 마켓을 우연히 발견했다. 일요일에는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지만 대신 이렇게 마켓이 열리기도 한다. 마켓에는 다양한 먹거리를 팔고 있다. 막 튀긴 츄러스, 보기만 해도 힘이 나는 초콜릿, 달콤한 과즙을 한가득 담고 있을 것 같은 과일, 지역 특산물이라는 꿀과 뚜똔 그리고 스페인 빵과 스페인 파이, 시원한 맥주와 주스, 오도독 씹어먹는 건강한 견과류 등. 우리가 그냥 지나칠 리가 없지. 누구도 그냥 지나칠 수 없을걸? 상점들을 하나하나 구경하며 어떤 걸 골라야 할지 고심하고 고심했다. 그렇게 선택한 우리의 점심은 스페인 파이와 주스! 마침 마켓 옆에서 길거리 공연을 하고 있어 우리는 어느 계단에 앉아 감상하며 스페인 파이 한 입 주스 한 모금. 

 

스페인 파이와 주스를 양껏 먹은 우리는 배부르다면서 D가 가보고 싶다던 추로스 가게로 빠르게 향하고 있다. 어라? 츄러스 가게 사장님이 한국말을 한다. 빨리빨리? 설탕 많이?라고. 한국인들 사이에서 유명한가 보다. 막 튀긴 츄러스에 설탕을 많이 많이 뿌려서 빨리빨리 받아먹으며 골목을 구석구석 탐방했다. 유럽 여행을 하며 골목의 매력에 빠진 우리는 바르셀로나의 골목을 발굴하고 정복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다. 이틀간 돌아다닌 람블라 거리와 카탈루냐 광장을 벗어나 구엘 공원 가는 방향으로 걸었다. 걷다 보니 대학교 안에 열린 빈티지 마켓이 있어 들어가 대학교와 함께 빈티지 마켓을 동시에 구경했다. 마켓을 두 군데를 보고 걷다 보니 벌써 오후 3시. 우리는 어느 한적한 카페에 들어가 멍 때리며 휴식을 취했다. 심지어 15분 동안 잠이 들었는데 지금까지 잤던 낮잠 중에 제일 깊은 잠이었다. 다시 힘을 내어 걷다 보니 어느 고요한 정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정원 인지도 모르고 들어간 곳은 Jardins De Rubio Lluch라는 곳이었다. 암스테르담에서 갔던 도심 속 정원이 생각나는 고요한 정원이다. 귤나무가 많고 카페가 하나 있었는데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D와 나는 호스텔로 돌아가기 위해 해변을 따라 걸었다. 유난히 햇살이 반짝여 바다와 하늘이 너무나 아름답다. 스페인 경찰에게 받은 상처로 스페인을 미워한다면 나만 손해일 것 같았다. 바르셀로나가 얄밉다. 우리는 같이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어디에 현지인이 많은지 둘러보았다. 그러다 어느 한 식당에 들어가기 전 아시아인이라고 조롱거리는 철없는 애xx들을 만났다. 분하다. 스페인 경찰이 오버랩되면서 씩씩 거렸지만 뭐 맛있는 거나 먹어야지 별수 있나. 우리는 식당에 들어가 문어 구이와 해물 빠에야를 주문했다. 해물 빠에야를 한 입 먹자마자 아, 다 용서하리라! 내가 바르셀로나에서 먹은 것 중에 가장 맛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황홀한 바르셀로나 네타 해변


생각해보니 바르셀로나에 오면 꼭 해야 할 것들을 하지 못하였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도 나름 계획이 있었는데.

오늘은 자전거를 빌려서 구엘 공원과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구경하고 자전거를 반납한 후 저녁에 몬주익 언덕에 올라가 야경을 감상하기로 했다. 
<무례한 바르셀로나 경찰> 중

스페인 경찰을 만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기분이 안 좋은데 구엘공원과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대수인가! 그러다 보니 남들에게 들었던 꼭 해봐야 하는 경험이 내게 꼭 맞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걸 알게 된 건 내가 꼭 해봐서이기도 하지만. 처음 독일로 여행 간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빠지지 않고 들었던 말이 맥주였다. 독일 하면 맥주라면서 맥주를 좋아하지 않는 나도 독일 맥주는 좋아하게 될 거라고 꼭 마셔보라고 추천했다. 나는 그래 독일까지 왔는데 독일 맥주를 마시지 않는 게 말이 되냐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식사를 주문할 때 빼놓지 않고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주문했다. 독일에 도착한 당일부터 14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리고 14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나는 맥주를 남겼고 좋아하지 않는 상태에서 벗어나 맥주를 입에도 대기 싫어지는 상태가 되었다. 그때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고 싶은지 하기 싫은지를 내가 아는 거라는 걸.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그만두면 된다. 결국 내가 그걸 몰라서 남들의 기대나 충고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항상 스트레스를 받는다. 바르셀로나에서도 쓸데없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알아챘다. 정말 가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을. 친구가 바르셀로나에 가서 가우디도 안 보고 뭐했냐고 하는데 가우디 말고도 많은 걸 보고 먹고 즐기느냐 바빴다고 말해주고 싶다. 가우디는 보고 싶을 때 가서 보면 되지.


안녕, 나의 170유로 우리의 340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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