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ngsari Sep 20. 2022

에세이를 쓰기로 했다.

고운, 수민, 재민과 2021년을 공유하기로 했다.

2021년의 시작은 눈부셨다.

1월 1일 바다를 보면서 한 해의 포부를 되새겼다. 시작은 늘 그렇듯이 기대와 설렘이었다.

30대의 시작, 꽤 유의미하다고 생각했다. 함께 나이를 먹는, 동일한 사업장의 봉급을 받는 친구들과 해피 뉴 이어를 외쳤다.

이미 사계절을 앞서 살아본 수빈과 꼭 닮은 상기된 표정으로 그 하루를 시작했고 

대충 나의 31살의 시작도 다를 바 없겠다고 짐작했다.


10개월의 헤프닝

실수가 있었다. 작은 헤프닝은 다부진 결심과 선택을 하게 했지만

10개월을 더 지나 보니 원점으로 돌아오는 제로섬이었다.

금단의 과실을 깨물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판도라의 상자는 무조건 열어젖혀야 정신을 차리는 나로서는

참 나다운 순간이었다.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아.


서울-오산

2020년 9월, 서울을 살았다.

서울을 사랑한 건 항상 반짝이는 걸 탐하는 내 본질이 이끈 무의식일지도 모른다.

서울을 체류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휴무에는 성수동 나들이를 했다.

서울숲과 뚝섬은 괜스레 나만의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고 힙한 와인바를 다니며 도시의 소중한 구성원이 된 것 마냥 흡족해했다.


오산은 잿빛과 같았다.

감각을 사로잡는 어떤 것도 없는 밍밍한 땅.

미지의 땅이었다. 삶을 영위한다는 대단한 목적을 갖고 그 알량한 돈을 벌겠다고 발을 디뎠다.

누구도 반겨주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땅에 마음을 누이지 않는데 무엇이 어깨를 내어주겠는가.

오산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일은 생존이었다.

하루에 두 끼를 혼자 먹었다.

20대, 이따금씩 홀로 식사를 하는 일은 특별한 이벤트였다.

끊임없이 울리는 카톡창에 대답을 하며 '혼밥'에 대해 자랑했고 지인들이 표하는 소소한 경외심에 스스로를 기특해했다.

2021년, 성인이 된 이후로 가장 오랜 시간

타의에 의해 혼자 술을 마시고, 혼자 생각을 하고 잠에 들었다. 더 이상 기특할 일이 아니었다.

일상을 버티고, 일상을 지켜내는 힘은 생각보다 소모가 크다.

오산은 나에게 그런 땅이 되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버티고 지켜낼 수 있는 마음에 추를 매달아 주었다.


심경의 변화

3월과 5월, 반성점에 집중했다면 9월과 11월 성취에 집중했다.

마인드 셋의 변화가 이렇게 양극단이라니.

알다가도 모를 일.


집착하는 숫자가 있었다.

30

1-1

10-2

30은 한 해를 지낸 나이였고 

1-1은 1월 1일 새해 첫날 , 10-2는 10월 2일 내 생일.


30의 1년은 내가 바라던 모든 것을 성취해야 하고 지성과 감성이 두루 깊고 짙어져야 하며

29년 간의 '나' 와는 달라야 한다는 집착이 있었다.

이상과는 다르게 그 어느 때보다 유치한 행동,

이성의 무게를 뒤엎는 감정에 괴로워하며 이 숫자를 살았다.


매체 속의 30의, 30을 갓 넘은, 30을 앞둔 여자들은 웃기다.

가끔 찌질하지만 당당하고 스토리 초입에는 능력이 부족할 지라도 말미에는 성취해낸다. 빠뜨릴 수 없는 한 가지, 예쁘다.

20대 초반, 32라는 숫자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한 '로맨스가 필요해 2'의 주인공 주열매(정유미)는 작곡가이자 음악감독이다. (아... 글을 쓰면서 다시 찾아보니 심지어 33살이다. 10년 동안 32의 환상에 살았는데...)

32라는 나이는 주열매처럼 생기 발랄하고 항상 에너제틱하지만 역경 앞에는 담담할 수 있을 거라는 환상.

아직 한 번의 사계절이 남았으니, 환상을 고이 모셔두기로 한다.

서른의 문턱에서 본 '멜로가 체질'은 웃기지만 우습지 않은 얘기다.

서른이든, 마흔이든 나로서는 겪고 싶지 않은 암담한 얘기를 시니컬하지만 사랑스럽게 하고 있다.

거부할 수 없는 깊은 공감은 주인공이 서른이라서, 매력적인 캐릭터라서, 명대사를 읊고 있어서

가 아니라

누구든 겪을 수 있는 일이라서, 이다.

20대와 30대가 다르다고 느낀 건 확실히 존재한다.

환상과 열정, 의지, 시간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줄어들고

그 어떤 비극적인, 비참한 사건이 '나의 일'이 될 수 있음을 통각하게 된다.

가장 최근에 본 '술꾼도시여자들' 은 현실이다. 술과 함께 할 수 있는 실수들은 비일비재하며, 직장에서 마주하는 MZ세대는 주인공을 당혹스럽게 한다.

주인공들은 아버지를 여의고, 아끼는 제자를 잃으며, 큰 병에 걸린다.

30을 앞둔 여자들은 각자의 멜로와 가치관을 지키며 다시 술을 마신다.

현실의 나와 친구, 지인, 주변인들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물론 매체 속의 여자들의 삶보다는 부족하고 시시하고 덜 예쁘지만 그만큼 덜 비극적이고 덜 비참하다.

어떤 인간 군상을 하고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일은

매체 속의 여자들과 현실의 모든 이들이 결정해야 하는, 꼭 닮은 문제고

나는 환상과 현실의 문턱을 넘나들면서

30을 지났다.


지독한 인연들이 지나가고

기억은 쉽게 굴절되는 속성이 있다. 외부의 환경, 시시각각 변하는 생각, 흐르는 시간은 순간의 채도를 높이기도 하고 무채색으로 텅 비어버리게도 한다.

2021년은 기억들이 더 가볍게 휘청거렸다.

'지금'을 굉장히 착실히 살아내고 있는 나는 지난 기억에 큰 의의를 두지 않게 되었다.

그때의 희로애락을 꺼내 보기에 '지금'의 하루는 부족하고 그것보다 넷플릭스의 신작들이 더 흥미롭다.

굳이 들여다본다면

지독한 인연들이 여럿 있었다.

4인의 악인(나만의 악인)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1. 무례하다.

2. 그들의 감정이 나의 감정보다 우위를 차지하려 했다. (이것은 배려가 없는 행동이다. 유아기의 비성숙한 감정 표현 혹은 독재자에 가깝다.)

3. 애정이 있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대부분의 인연은 일종의 애정으로 발단되며, 우정이나 동료애 또한 포함된다.

그러므로 사회적인 관계로 인해 맺어지는 인연은 더욱 쉽게 변질된다.

나의 악인들이 그러했고 그들로 인한 상념들은 꽤 지독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가 채울 수 있는 그릇을 가지고 있다.

여러 개의 그릇 중 나의 인연을 담은 그릇은 네 개의 내용물을 비워 냈고 (생각해보면 내 그릇에서 '상사' 들은 대부분 6개월 뒤에 쏟아 버린다.)

오롯이 그만큼이 채워졌다.

올해부터는 밀폐 용기로 대체하는 것도 썩 괜찮을 것 같다.


2021 JEJU

사랑하는 실버와 제주의 아침

휴양지로 드나들던 제주.

올해는 소중한 친구네 집이었다.

함께 바다를 보고, 마시고 웃고 떠들었다.

어쩌면 인생에서 제주가 가장 만만하고 아늑한 순간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 마침내, 여행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