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되어 보겠다고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지만, 전공 수업 중 듣게 된 광고에 빠져 무작정 광고업계에 발을 들여놨다. 매일 아침 8시 전용 텀블러에 모닝 아메리카노를 사다 드려야 하는 사수도 있었고, 전세계 영상을 다 뒤지어서라도 레퍼런스로 적합한 장면을 찾기 위해 밤을 새는 일은 수두룩했다.(차라리 그 장면을 뛰쳐나가 카메라로 찍는 편이 빠를 것 같았다) 너는 왜 광고카피를 쓰는 게 아니라 혼자 문학을 하고 있냐는 핀잔을 듣기도 하고, 내가 선택한 업체에 문제가 생기면 손해배상을 하겠다는 서명을 하며 맘 졸이기도 했다.
8년 가까이 일을 해오며 나는 어느덧 광고주 앞에서 때로 큰소리도 치고, 같은 팀 신입들을 다독이며 커피 한 잔 사주기도 하는 선배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길지 않은 세월이지만 나와 함께한 회사들이 감사하게도 내 능력을 꽤 인정해주었고, 어리다 싶은 나이에 과장님 소리를 듣게 되었다. 경력이 쌓여도 권한은 여전히 없고 책임만 늘어가는 현실에 좌절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나는 내 일을 사랑하는 게 분명했다. 프로젝트가 성공리에 끝나고, 몇 달을 애써온 작품이 온에어 되거나 오픈을 하게 되면 그 앞에 앉아 한참을 만끽했다. 겉으론 힘들다 투덜거렸지만 일 할 때의 내 에너지가 좋았다. 수다쟁이가 되었고 아이디어가 샘솟았고, 벅찼지만 해냈다는 만족감은 다른 곳에서 대체할 수 없었다.
많이 지쳤던 어느 날 퇴사를 결정했고, 붙잡아준 회사의 손을 웃으며 뿌리쳤다. 솔직한 심정으로 바통 터치 이직을 해온 터라 쉬어 본 적 없는 내게, 휴식을 좀 주고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시기에 아기가 생겼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느정도 휴식도 취했고 아기도 생겼으니 이제 다 된 것 아닌가 싶지만, 여전히 내 마음을 복잡이는 건 그 다음이다.
‘엄마’라는 신입사원으로 얼마간 시간을 보내고 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나의 신입기간은 얼마나 오래 이어지는 걸까. 신입기간이 끝나면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돌아가는 게 내가 정말 온전히 원하는 걸까. 아기에겐 어떤 게 좋은 방향일까. 원래 내 자리가 아니라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면 그럴 만한 용기가 내게 있을까. 잘해낼 수 있을까. 잠자리에 누워 생각을 하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블랙홀 같은 질문 속에 갇혀 한 가지도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마주한다.
다른 애기 엄마들을 보면 아기를 낳고도 일을 척척 잘 해낸다. 아직 어린 아기지만 유치원에 맡기거나 돌봄 이모님께 맡기고 이전처럼 출퇴근을 한다. 나도 그렇게 할까 생각하다 보면, 아직 어린 아기를 누군가에게 온전히 맡긴다는 것을 할 만큼 대담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늘 불안해할 것이고, 아프다는 소식에 뛰쳐나갈 것이고, 내 업무특성상 갑자기 결정되는 수많은 사항과 야근에 능숙히 대처하지 못할 것이다.
또 다른 애기 엄마들 중에는 아기를 돌보며 인스타그램을 통해 아기 용품을 공구해서 팔거나, 아기와 유튜브를 찍어 새로운 수익을 내는 쪽도 있다. 생각해보면 어느정도 내 전공과도 맞는 면이 있어 도전해볼만 한 것 같은데, 과연 내가 내 얼굴과 아기 얼굴을 다 공개하며 능청스럽게 보일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아기는 엄밀히 말해 노출되는 것에 대한 인지도 못하고 아웃팅되는건데, 이 부분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제 대담하게 일해 나가던 과장은 없고 용기 없고 소심한 신입만이 남았다. 아직은 육아가 어떤 건지, 내가 얼마 만큼을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감이 오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그 다음을 고민하자니 수많은 핑계와 불안만 가득하다.
어느덧 아기와 만나는 계절인 겨울에 들어가고있다. 코 끝이 시린 날도 있고 입김이 보이기도 한다. 내가 처음 TV광고 프로덕션에 들어가, 베테랑 감독님들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살아남아 보려고 하루하루 애썼던 걸 떠올리며 다시금 그 때의 마음을 가져봐야 할 것 같다. 퇴사도 없고 이직도 없는 회사에 입사했지만, 늘 그렇듯 예상치 못한 난관이 있겠지만, 분명 순간의 보람이 존재할 거고, 그 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할 거다. 지금은 모르는 게 맞다. 생각해봤자 가슴만 답답한 게 맞다. 늘 그랬듯 눈 앞에 있는 일을 하나씩 해 나가면서, 그 안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찾으면 된다.
화이팅이다! 늘 후배를 응원하던 그 마음을 오늘은 내게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