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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매진 겨드랑이만큼 시커메진 마음

by 스루기

주변에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이 많이 있다. 한 번씩 친구들을 만나면 여전히 회사 이야기와 남자친구 이야기, 혹은 요즘 재미있게 본 공연이나 다녀온 여행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도 여전히 그런 이야기가 무척 흥미롭지만 이렇게 아기를 가지고 집에 앉아 있다 보니, 누군가가 나에게 결혼을 하면 이러이러하더라 혹은 임신을 하면 이렇게 되더라 하는 말을 미리 귀띔해줬다면 좀 더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회사에 다닐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아침에 집을 나와 지하철을 타러 걸어가던 시간이었다. 물론 난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 매일 침대에서 나와의 사투를 벌였지만, 이내 포기하고 옷을 갖춰 입고 화장을 하고 어울리는 가방을 메고 선선한 아침바람을 맞으면서 걸으면 그 걸음이 말 그대로 가벼운 구름위를 걷는 것 같았다. 회사가 좋았 다기보다는, 나도 사회의 일부로서 내 몫을 하러 가는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남이 보기엔 비슷했겠지만 그 날 그 날 어울리는 옷을 골라 입는 것도 참 즐거운 일이었다. 거의 매일 아침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그 날의 착 샷을 찍어 남겨두었는데 지금도 가끔 꺼내 보면 즐거웠던 기분이 고스란히 피어 오른다.


<불과 몇 달 전 사진들을 보다보면 내가 참 훨훨 날아다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기를 가지면서 특히 초반에는 더욱 밖으로의 외출이 조심스러웠다. 자주 넘어지던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히 걸으려 했고, 집안 일은 사부작 사부작 했지만 불필요한 약속을 잡지는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아기가 점점 커지면서 내 몸에도 변화가 생겼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은밀한 곳의 변화도 있었지만 눈에 띄게 보이는 변화들도 꽤 있었다. 난생 처음 얼굴에는 꽤 큰 기미가 두 개나 생겼고, 양쪽 겨드랑이는 점점 까만 색으로 변해 당황스러웠다. 찾아보니 임신 중에는 착색이 눈에 띄게 나타나 아기를 낳을 때까지는 보일 수 있는 현상이라 하지만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 같은 이 까만색 겨드랑이가 눈에 보일 때마다 내 마음이 같이 타 들어갔다.


아직 나오지도 않은 배에 열심히 튼살크림을 바르기 시작했고, 눈에 띄게 빠지는 머리카락을 붙잡으려 탈모 샴푸를 써 보기도 했다. 집에만 대부분 있으니 화장을 할 일도 거의 없었다. 외출을 해도 나쁜 성분이 빠졌다는 선크림을 찾아 바르는 것이 다였고 작년에 했던 눈썹 타투는 이제 거의 흐려져 갔다. 젤 네일을 좋아했었지만 지금은 손톱을 자주 깎아주는 것만이 가장 예쁜 방법이었다. 애매하게 길어진 단발머리도 펌을 한 번 하고 싶었지만 아기에게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단념했다. 악세서리를 좋아해 두 손에 다섯 개씩 끼고 다니던 반지들도 다 빼 두게 되었다. 한 번씩 부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들은 더는 예뻐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은 몸무게의 앞자리가 난 생 처음 바뀐 걸 알게 되었다. 물론 나와 아기, 양수, 태반 등의 무게가 합쳐진 거라고 자신을 설득해봤지만 그래도 언제나 40키로대를 유지하던 나에겐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아직 아기가 나오려면 한 참이 남았는데 어디까지 몸무게가 늘어날지 심란했다. 그 동안 변비를 이겨내 보겠다고 먹었던 과일과 고구마가 나를 괜히 살찌운 건 아닌지, 변비와 살 중에 무엇을 택해야 할지, 그래도 아기에게 좋은 쪽을 택해야 하는 건 아닐지, 그러다가 키도 작은 내가 통통이로 살아가야 하는 건 싫은데 하는 생각이 내 마음을 휘저었다.


희생하지 않는 엄마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난 괜찮다라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아직은 그리고 아마도 더 오랫동안 보살핌 받고 싶은 나도 ‘사람’일 것이다. 다만 새로 부여 받은 역할에 충실히 임하고 가끔은 꾀를 부리더라도 꾸준히 해 나가고 싶은 마음은 분명히 있다. 나의 일부를 잃더라도, 일부는 지키고, 또 새로운 일부를 얻는 일. 지금 그런 일을 해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동안 아기가 배에서 움직이는 태동이 느껴진다. 20주가 되면서 움직임이 더 커지는 아기가 대견하고 안심된다. 잠깐이지만 겨드랑이가 까매져도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이런 마음 저런 마음이 물감처럼 섞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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