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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꺼실이 Oct 07. 2020

간신히 왕진을 마치다

시골에 살아 행복한 의사 이야기

왕진을 갔다.

48세 남자 김 멋진 씨(가명). 고등학교 때 친구한테 머리를 심하게 맞은 이후로 조현병이 되었다고 그의 노모는 말하신다. 공부도 아주 잘하고 그림도 잘 그렸었는데 병에 걸린 이후 집에만 있고 대인기피증이 있어 병원에 데리고 나올 수가 없다고 한단다. 정신과 약은 대신 가서 타오고 있고 안성시 정신보건센터에서 가끔 방문을 하고 있다. 한 달 전에 방문하였는데 오늘은 세 가지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혈압이 높았었기 때문에 다시 체크하여 투약 여부를 결정해야 하고 발톱이 안 좋다 하여 상황을 봐야 했으며 약을 타는 병원에서 피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며 누나가 요청하셔서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아마 본인한텐 얘기가 안되어 있었던 듯. 내 얼굴을 보자 “왜 왔어요?” “가세요. 진료 안 봐요.” 하신다. 처음 보는 사람 같았으면 당황했을 텐데 “어머나, 나 바쁜 사람인데. 시간 내서 왔는데 그러시면 내가 섭섭하잖아요.” 하니 살짝 누그러진다.

“잘 지내셨어요? 저번에 피부약 먹고 어땠어요?” “좋아지고 있는데 또 재발할 것 같아요.” “그건 습하면 재발을 잘하는 질환이니 땀이 차지 않도록 주의하시면 재발이 덜할 거예요. 좀 봐도 될까요?” “싫어요. 부끄러워요.” “어쩌나. 하지만 경과를 봐야 하니 요 쪽으로 조금만 들춰서 볼게요.” 간신히 동의를 얻어서 보았다.

     

“많이 좋아졌네요. 이제 혈압을 재야 하는데..” “ 절대 안 재요. 지금 약 먹는 것도 지겨운데 혈압약까지 먹을 생각 없어요. 그냥 죽을래요. 사는 거 너무 힘들어요.” “약이 너무 많으니 그런 생각이 들만도 하겠네요. 그런데 말이에요. 원래 혈압이 괜찮은데 저번에 저를 처음 보고 긴장해서 일시적으로 높았을 수도 있어요. 오늘 재보고 괜찮으면 안심이 될 수도 있는데. 만일 그래도 높으면 약을 먹을지 말지는 다시 생각해요.” 간신히 혈압을 쟀다. 다행히 122/80. 정상이다. “그거 봐요. 재기 잘했지.” 하니 씩 웃는다.

     

“ 아 발톱이 아프다면서요. 한번 볼까요?” 이번엔 선선히 보여 준다. “발톱 무좀이네요 잘 됐어요. 저번에 피부 때문에 먹던 약으로 이어서 6-12개월 일주일에 한 번씩 먹으면 돼요.”

     

 이제 혈액 샘플을 해야 할 차례다. 이렇게 저렇게 얘기를 건네 본다. 지금 먹는 약이 백혈구를 떨어뜨릴 수도 있어서 확인해야 되고 혈압이 있으니 콜레스테롤도 높을 가능성도 있고 무좀약을 먹었으니 간 기능 검사도 필요하고... 설득해보지만 완강하다. “ 환자의 자기 결정권이 있는 것 아니에요?” 하신다. 정신질환이 있어서 그렇지 원래 똑똑한 분이다. “맞아요. 하지만 환자는 의사의 권유를 따라야 할 의무도 있지요.” “저번에 다른 병원에서 와서 피를 여러 번 뽑아가서 너무 싫었어요.” “ 아 안 좋은 기억이 있었군요. 정말 싫었겠네요. 그러면 검사한 지 1년이 안됐으니 올해 가을에는 하기로 해요.” 그러나 “그때 가서 생각해볼게요.” 한다.

만만치 않다. 하지만 아주 급한 게 아니라면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차후의 치료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이 정도로 만족한다. 김 멋진 씨는 방으로 들어가더니 스케치북을 가져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준다. 그림이 꽤 훌륭하다. 아프기 전에는 훨씬 더 잘 그렸다고 노모는 열심히 설명하신다. 마음이 조금 열리는지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수군거려서 만나기 싫다고 한다. “그럼 텃밭 농사를 지으면 어떨까요? 저도 작물을 키워보니 너무 소중하고 좋던데요.” 하니 잠시 눈이 빛난다. “전에 농사짓다가 아버지한테 혼난 적이 있어서 싫어요.” 한다. 또 실패. 쉽게 움직일 리는 없지. 세 가지 미션 중 두 가지밖에 못한 칠칠치 못한 의사지만 잠시나마 마음이 통했음에 위안을 얻고 집을 나선다. 그래도 이렇게 대인기피증이 환자도 의시라는 이유만으로 다가갈 수 있음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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