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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꺼실이 Oct 21. 2020

그는 산이고 나는 물이다

시골에 살아 행복한 의사 이야기


남편은 나보다 2년 선배다. 그는 그저 묵묵한 사람이다. 본인을 드러내는 일이 없다. 의료협동조합을 하는 것, 들꽃피는 마을에 사는 것을 늘 자랑하는 나와는 달리 그는 ‘소띠’ 답게 일만 한다. 학생 때도 함께 기독학생회를 했지만 활동력이 강한 선배들에 비해 그저 자리를 지키기만 하는 듯했다.

 결혼 후에 그는 ‘설거지는 내가 할게’하더니 여태 그 약속을 지켰다. 설거지는 나도 좀 하지만 청소는 거의 혼자 다 한다. 교회에서도 남자들이 설거지하는 바람을 일으켜 우리가 다니는 백성 교회는 ‘목사님도 설거지하는 교회’로 소문이 났다. 요즘이야 흔한 일이지만 89년 결혼 당시만 해도 일하는 여성도 많지 않았고 설거지하는 남자는 더욱더 드문 일이었다. 그가 일하는 안성농민의원에서는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 했다.

     

 누가 들으면 참 자상한 남자로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다정한 말 한마디 해줬으면 하는 때에도 아무 말이 없다. 말이 없으니 날카로워 보여 오랫동안 사귄 사람들도 많이 어려워하는 편이다. 의료협동조합을 한국에서 최초로 만들어 첫 원장으로 일하게 되면서 여러 부분에서 우리만의 원칙을 세우고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 많았다. 항생제, 주사제 사용의 문제, 국가검진 없던 시절에 조합원 검진을 시행하는 일, 의사의 급여 문제, 예방활동, 방문보건활동 등. 수많은 논의와 실행 속에서 그의 흔들림 없는 모습과 묵묵함은 의료협동조합의 든든한 초석이 되었다. 의료협동조합이 뭔지 일일이 설명해야 조합원 가입을 시킬 수 있는 상황에서(초기에는 빨갱이 조직이라는 모함도 있었다) 그의 든든함에 대한 신뢰로 우리는 조합원들을 늘려갈 수 있었다. 그로부터 26년의 세월.

 변변한 조합 건물 하나 갖지 못해 이제야 9층짜리 건물을 설계 중이지만 2019년엔 문재인 대통령에게 사회적 경제 부문에서 받는 상 중 최고의 상인 동백장 훈장을 수여받는 경사가 생겼다.

 든든히 서 있는 산 같은 그. 나는 그를 산이고 나는 물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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