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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슬 Dec 29. 2021

[아내 일기]#4. 여유롭게 찰나를

결혼식 날, 찰나를 기억하게 해준 그의 다정함. 


그날, 그 시선, 그 다정함을 잊을 수 없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이왔다. 예상했던 것보다 정신이 없고, 여러번 이미지트레이닝을 했는데 오랜만에 낀 렌즈 때문인지 앞이 뿌옇다. 이제 곧 남편, 아니 남자친구 손을 잡고 계단 앞에 서야한다며 매니저분이 그를 데려왔다. 애써 웃고 있는데 입꼬리는 경련이 일어날 것만 같고 아직 인사가 끝나지 않은 친구들이 연신 내 이름을 불러댄다.


"자기야!"


나를 부른다. 부케를 꼭 쥐고 있는 내 한손을 그가 잡는다. 내 왼쪽으로 한없이 다정하고 침착한 그의 목소리가 나의 시선을 잡는다. 


"자기야, 나 봐! 내 눈 봐!"


여기 모든 사람들이 말이 웅성웅성, 제대로된 이목구비가 눈에 들에 들어오지 않는데 날 부르며 웃는 그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인다. 이제 우리는 버진로드로 향하는 계단을 오를 예정이다. 저 계단 위에서 내가 아빠의 손을 잡기 전, 그가 먼저 아버님과 버진로드를 걸어갈거다. 긴 로비를 지나, 계단 앞에 섰고 두근거리는 심장소리에 발걸음과 목소리가 떨렸다.


"자기야, 나 잘할 수 있겠지?"


그러자 그가 상체를 살짝 숙이며 내 손을 꼬옥 잡고 내 눈을 본다. 


" 응 그럼~ 가면서 여기 와주신 분들 눈 잘 보고 잘 기억하자 오늘 하루, 아주 소중한 하루가 찰나야. "

"그래, 찰나야!" 


이 한마디가 내 여유로운 미소를 자아냈다. 덕분에 계단을 올라 날 기다리는 아빠의 얼굴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버진로드를 걸으며 아빠의 옆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려운 시국에도 먼 거리를 찾아와 박수쳐주는 지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결혼식 내내 내 표정을 살피고, 내 모습을 살폈다.


"자기야. 우리에게 다신 오지 못할 하루일거야"

"여기 와주신 분들 조명 어두워도 잘 보인다. 눈 다 마주치고 잘 기억하자"


이 한마디 덕분에 객석에 앉아 울고 있는 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엄마 왜 우냐고 언니의 눈물을 조카가 닦고 있었다. 내게는 엄마같은 언니. 자꾸만 나를 깨워주는 남편 덕분에 긴장하며 축사를 읽는 친구의 손떨림마저 기억한다. 차마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인사하는 딸을 안아주지 못하고 바로 뒤돌아 자리로 가서 앉는 아빠의 뒷모습이 기억난다. 버진로드를 걸으며 진짜 하나가 되었을 때 박수쳐주는 이들의 미소와 목소리마저 기억이 난다.


찰나같은 순간이 지나갔지만 순간의 찰나가 모두 기억나고 기록되었다.


결혼식을 앞둔 그는 아마도 어리둥절 정신이 쏙 빠져있을 나를 상상했을 것이다. 버진로드를 걸어갈 때, 주례사를 들으며, 부모님과 인사하며 그 순간 생길 감정선을 예상하며 내 얼굴이 일그러질때마다 해줄 수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는 내 여보. 그 때마다 나를 불러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불러서 내가 그 감정에 빠져 이 소중한 순간을 잊지 않도록 해주려고. 지금 내가 봐야할 사람들, 나의 소중한 순간들을 보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그의 다정한 말들이 찰나처럼 지날 수 있었던 내 인생의 한번 뿐만 결혼식 날을 마치 마법의 주문같은 말로 아주 소중한 순간들을 짧은 영상처럼 남길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찰나를 기억할 수 있게, 나를 불러주던 모습. 

지금도 남편은 언제나 좋은 풍경을 볼때면 나를 부르거나, 내가 옆에 없을 땐 사진으로 기록해두고 꼭 보여준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결혼식 날이 떠오른다. 결혼식 이후 정신없는 나날들로 소중한 순간들을 지나칠때면 그것을 되새김할 수 있게 남편은 나의 정신을 깨운다. 남편의 다정한 순간들이 수 많은데 그것 중 하나가 그의 목소리로 내 정신을 깨울때다. 고집스런 나를 불러 세우고 기록하게 하는 다정한 내편.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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