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치마를 두르는 시간

by 정안

나에게 힘을 주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곤한다. 그 중 손에 꼽히는 물건이 '앞치마'다.


나에게 앞치마 두르기란


한 무더기의 할 일을 두고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일단 앞치마를 두른다. 귀차니즘을 깨는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자 나를 조금 더 신나게 움직이게 해주는 묘약 같은 것이기도 하다.


'일단 앞치마를 두르고'라고 중얼거리며, 앞치마를 머리에 넣어 입기 시작하면, 양 팔과 어깨 두 손 모두 분주해진다. 머리 위부터 등 뒤 까지 바삐 손이 오가면서 어깨끈과 치맛자락을 정돈하고, 등 뒤에서 허리끈을 묶어 마무리한다. 앞치마만 둘렀을 뿐인데, 몇 초만에 신진대사가 조금은 활발해진다.


"난 언니가 그 앞치마 하고 있는 거 볼 때마다 웃음이 나. 좀 유난스러워 보인달까. 어쨌든 신나 보여서 좋긴 해."

집에선 거의 앞치마와 혼연일체다. 두를 때마다 내가 빨강머리 앤이라도 되는 양 살짝 명랑해지는 기분이 된다.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의 몇 장면. 신나 보이는 앤과 다이애나. 이 정도는 아니라도 나도 앞치마를 두르면 좀 신나 진다.


평소 어떤 몰에 가도 앞치마 코너는 들른다. 종류도 다양하지는 않은 편이고, 가격도 싸지 않다. 그래도 비싸서 못 산다기보다 마음에 똑 드는 것이 잘 없다.


지금 애정 하는 앞치마는 5년째 사용 중이다. 아끼며 사용하다 보니 그리 되기도 했지만, 마음에 드는 다른 앞치마를 못 봤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내가 까다롭지 않다고 생각을 하는데, 가족들은 무슨 소리냐는 반응이다.

"마음에 드는 앞치마를 5년에 한 번 찾을까 말까 하잖아? 까다롭지 않다고?"



까다롭지 않은(?) 나에게 만족감을 주는 앞치마는


'목에 부담을 주지 않는 형태와 무게, 더럼과 구김이 많이 가지 않을 색상과 소재, 편안한 착용감, 합리적 가격을 가진, 무엇보다 둘렀을 때 신이 나는(?!) 앞치마.'


앞치마는 크게 4가지 정도의 형태가 있다.(목에 거는 형태, 양쪽 어깨에 거는 형태, 허리에 두르는 형태, 입는 셰프 셔츠) 개인적인 취향은 '양쪽 어깨 걸이 형'. 목에 거는 형은 목에 앞치마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다. 허리에만 두르는 형은, 집안일에 엉성한 내가 둘렀을 때 옷이 쉬이 지저분해진다.


소재는 원단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에 단순히 가벼운 것을 선호한다. 교환 환불은 거의 하지 않는 나로서는, 찾아가는 번거로움이 있더라도 착용해 보고 구매하는 편이다.


5년간 애용하고 있는 앞치마는 우연히 들른 동네에서 발견하고 기쁜 마음으로 샀다. 무척 가벼웠고, 무엇보다 대충 아무거나 휘두른 느낌이 아닌, 괜찮은 옷을 챙겨 입은 기분이 들어 좋았다.



앞치마와 함께 하는 시간


앞치마는 속옷만큼 나의 날것 그대로의 마음을 많이 알 것이다. 시댁 어른들 모시는 집들이 하던 날엔 곱게 다려 입고 긴장감을 다독였고, 폭풍우 뚫고 이사하던 날엔 걸쳐 입은 앞치마 덕에 후줄근한 기분을 덜었다. 쓰레기 버리러 갈 때도 앞치마를 두르면 마음만은 한결 산뜻해진다.


남편과 말다툼을 했을 때 앞치마로 내 마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앞치마를 두르고 있던 중에 다퉜으면 앞치마를 벗는다. 집안일 파업(?) 같은 의미다. 앞치마를 두르지 않고 있다 다퉜을 땐 오히려 앞치마를 두르기도 한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집안일에 격하게(?!) 몰두할 예정이니 나에게 말을 걸지 마시오' 같은 의미로.


앞치마를 두르면서 면장갑이나 니트릴 장갑을 끼기도 한다. 그러면 집안일을 거침없이 마구 할 수 있기 때문인데, 가족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대놓고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누가 보면 엄청 살림꾼인 줄 알겠다."


나 또한 기분이 나쁘진 않다. 내 방식대로 즐기며 할 수 있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부산스레 움직이면 아이나 남편도 자기 몫의 일을 찾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해도 티 안 나고 끝이 없어 지치기도 한다.


'같이 사는 집인데, 집안일은 왜 나만 하는 것 같지?'


좋든 싫든, 나와 가족이 살아가는 터전을 돌보는 일은 해야 하는 일이다. 조금이라도 더 즐기며 할 수 있는 방법이 나에게는 앞치마를 두르는 것이다. 앞치마를 두르면 '지금, 할 수 있는 있는 작은 일'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깨끗해진 집안 한 구석 만으로도, 앞치마를 벗으며 그날의 집안일에서 퇴근하는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그대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조금 더 기쁘게 움직여 보라고


앞치마를 입으세요


삶이 지루하거든 / 앞치마를 입으세요 //

꽃밭에 물을 줄 땐 / 꽃무늬의 앞치마를 //

부엌에서 일을 할 땐 / 줄무늬의 앞치마를 //

청소하고 빨래할 땐 / 물방울무늬의 앞치마를 /

입어보세요 //

흙냄새 비누냄새 반찬 냄새 / 그대의 땀냄새를 풍기며/

앞치마는 속삭일 거예요 //

그대의 삶을 /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

조금 더 기쁘게 / 움직여 보라고 //

앞치마는 그대 앞에서 / 끊임없이 꿈을 꾸며 /

희망을 재촉하는 / 친구가 될 거예요 //

때로는 / 하늘과 구름도 / 담아줄 거예요


- '서로 사랑하면 언제라도 봄' 이해인 시집 p72.


언젠가 책 제목에 마음을 빼앗겨 샀던 시집이다. 평소에 앞치마를 두르면, 조금은 '영차'하며 힘이 난다고 느꼈던 이유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주는 시를 만난 기분이었다. 온갖 음식 냄새, 느리고 서툰 솜씨로 진땀 뺀 덕에 베었을 나의 땀냄새, 청소를 하며 묻었을 먼지들, 내가 안 하면 집안일은 아무도 안 한다며 툴툴거리며 나왔을 한숨들, 맛있게 된 음식이나 깨끗하게 정리된 한구석을 보며 지었을 미소. 그 모든 것들을 편집되지 않은 원본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앞치마는, 내가 괜찮은 사람인 척하지 않아도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를 알아주고 아무 말 없이 감싸주는 것 같다.



얼마 전 앞치마에 김칫국물이 잔뜩 튀는 사건이 발생했다. 세탁에도 김치얼룩은 소용이 없었다. 서너 개 있는 것 중, 가장 좋아하는 앞치마가 그리 된 것이다. 당장 새 앞치마가 필요했다. 발걸음을 재촉해 동네에 앞치마를 파는 곳을 모두 찾아다녔다. 다행히 마음에 드는 앞치마를 발견. 좀 비싸긴 했지만 그 정도 마음에 드는 앞치마는 여태 못 봤다며, 결심을 굳혔다.


마지막 상품인 진열상품의 색이 약간 바래서 나의 눈치를 살피시던 사장님. 말씀 안 하셨으면 몰랐을 정도의 흠이었기에 그냥 달라고 말씀드렸다. 사장님은 주름이 깊게 파이도록 진하게 눈을 한번 감았다 뜨시더니, 시원하게 할인해주셨다. 5년 만에 새로운 짝꿍, 새 앞치마가 생겼다.


맛있는 음식을 하며 설레고, 집안을 돌보며 개운해지기도 하고, 걱정 근심 후줄근한 마음은 먼지 털어버리듯 가볍게 하며, 매일, 지금을 즐기고 싶다. 이 정도 즐거움, 기쁨은 필요할 때 미루지 말고 스스로에게 챙겨주며 살았으면 한다.



이전 06화무지개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