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휴대폰을 보니 시간은 한시 반.
뭔가 한심하단 생각을 하며 천장을 바라봤다. 온몸이 끈적임을 느끼며 바라보는 천장, 그리고 대각선으로 들려오는 매미소리. 한참을 그 시간을 즐겼다.
30분을 그러고 있으니 드디어 배에서 신호가 왔다. 이미 늦어진 점심시간에 별로 배도 고프지 않았다. 라면이나 먹자는 생각에 악동뮤지션 라면인 건가를 흥얼거리며 냄비에 물을 올린다. 어쩐지 저 노래를 떠올리면 없던 식욕도 생긴다.
땀을 꽤나 흘리며 국물까지 남김없이 마셨다. 라면은 단순히 값이 싸서가 아니라, 가격 대비 맛의 만족도가 가장 높아서 손이 간다. 퇴사하고 실업급여도 없이 당당히 나온 나는, 얼마 후 배달 하나 시키는 것에 손 떨리는 퇴사의 차디찬 현실을 직면했다. 내게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중에 하나였다. 퇴사로 인해 '맛있는 걸 마음 편히 먹을 자유'를 박탈당한 다는 것, 아주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다.
노트와 펜을 챙겨서 집을 나섰다. 마주치지 않으려 밖이 고요할 때 나왔건만, 1층 아저씨가 문 앞에서 오토바이를 닦고 있었다. 그 아저씨는 온 세상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길거리에 쓰레기 하나 잘못 버려져 있으면 골목에서 할머니들과 신고한다며 크게 떠들었고, 평일 낮에 다니는 나를 항상 빤히 쳐다보았다.
젊은 아가씨가 일도 안 하고 백수 같아서 보는 건가? 아저씨의 시선이 가슴팍으로 내려가기 전에 쌩하고 골목길로 빠른 걸음을 내딛는다.
카페에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앉았다. 여기엔 나 같은 사람이 많다. 다들 혼자 무언가에 열중하며 노트북을 하는 모습들. 살면서 한 번씩 자아에 깊게 빠지는 순간들이 온다. 30살에 다시 그 순간이 온 나는 꼬질한 노트를 펼쳐 끄적이기 시작했다.
뭘 하고 살아야 하지?
앞 페이지에는 수많은 고민의 흔적들이 펼쳐져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뭔지, 잘했던 건 무엇인지, 일생에 즐거웠던 경험은 뭐였는지. 쓰다가 지워지고 펜들의 선이 엉켜있고 결국 끝에는 알 수 없는 곰돌이가 그려져 있다.
카페인이 뇌를 한 바퀴 도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바깥 풍경을 보며 여유롭게 커피 마시는 게 회사 다닐 때 소원이었는데. 사실 매일 커피 먹으러 다니고 게임하고 놀면 좋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무언가 나의 일을 하다가 남은 시간에 얻는 것이 즐거운 것이지, 매일 당연히 가지게 되는 것은 일상이 될 뿐이다.
이런저런 할 일들을 하고, 해가 저물려 할 때 일어난다. 혼란스럽고 복잡한 머리에 한숨을 쉴 때도 있었지만, 또 여러 가지 발견된 것들도 있다. 의식의 확장됨을 느끼며 마늘을 사러 시장에 갔다.
저녁 메뉴는 알리오 올리오다. 마늘을 편 썰고 페페론치노를 잔뜩 넣는다. 파스타면을 넣고 면수와 휘휘 저어주면 참을 수 없이 맛있는 향이 올라온다.
저녁을 다 먹고 9시지만 나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퇴사하고 이미 낮과 밤이 바뀐 지가 오래라 적어도 새벽 3시까지는 깨있을 터였다. 문득 나의 불면증을 걱정해 준 친구들의 선물이 눈에 밟혔다. 침실 한편에 놓여 있는 인센스 스틱, 그리고 아로마 괄사오일. 잠 안 오는 새벽, 사람에 대한 분노가 한 번씩 휘몰아칠 때 저 물건들은 그것들을 잠재워준다.
새벽까지 자막을 쓰고 영상편집하다 보니 시간은 벌써 4시였다. 꼼짝 않고 화면에 집중했더니 머리가 띵하고 눈이 시려온다. 얼른 자야겠다는 생각에 하얀 침대 속으로 몸을 파고든다.
내일 또 나는 늦은 시간에 일어날 것이다. 찬장에서 라면을 꺼내고, 노트북 혹은 공책을 펼치겠지.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 날들. 숨 막히는 나와의 조우 속에서 나는 부서지지 않는 거울을 깨뜨리려 계속 주먹질한다. 확실한 건 이미 거울에는 금이 가있다는 사실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