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세아 Sep 20. 2023

나는 더 이상 불안하지 않다

퇴사 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의 현실


여름밤 진흙 냄새가 기억을 뒤덮는다. 어떤 공기의 냄새를 맡으면 그때의 시간과 감정으로 되돌아간다. 눈앞에는 광안대교가 있고 수진이가 피우는 담배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준환은 회를 집어먹고 있다. 그에게는 항상 쇠와 풀 같은 향수 향이 짙다. 엉망으로 자유롭게 놀아대던 20대 초반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 나는 30살, 3번의 퇴사를 겪고 프리랜서를 시작한 지 1년째다.


소위 말하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중인데, 사람들은 퇴사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무조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다. 나조차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현실은 꼭 행복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강조하는 미디어는 많지만, '하고 싶은 일'을 실행했을 때 수반되는 현실에 대해서 알려주는 곳은 적다.

내가 1년 동안 경험하면서 느꼈던 감정과 일들을 솔직하게 써보려고 한다. 그리고 가장 강렬하게 나를 힘들게 했던 '불안'이라는 감정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도.




1. MBTI I도 혼자 일하는 건 힘들다

남들은 회사에 출근하는 시각, 여유롭게 일어나 카페로 향한다. 카페에서 향기로운 커피냄새를 맡으며 노트북을 켠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시간만큼,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일을 한다. 일하는 동료와의 스트레스도 없고 평화로운 날들. 사람들이 상상하고 꿈꾸는 프리랜서의 일상이다. 나도 이런 게 로망이었던 파워내향인 INFJ였다. 그러나 역시 현실은 다르다.

물론 몇 달간은 이 생활이 좋았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뭐든 쉬운 일은 없다고, 혼자 일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점점 우울감이 느껴졌다. 바깥에서 오는 에너지가 없으니 쉽게 기분이 가라앉는 것이었다. 혼자 영상 찍고 돈 버는 유튜버들을 보며 여유롭게 일한다며 부러워했는데, 놀면서 수입을 얻는 게 참 쉬워 보였는데, 현실이 되니 그들의 고충이 확 느껴졌다. 다들 혼자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구나.

집에서 일하니 계속 침대에 늘어지고 싶은 유혹이 많아졌다. 누가 보는 이 없으니 스스로 나를 일으켜 세우고 카페에 가거나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집청소를 하고. 매일이 반복되는 숨 막히는 나와의 접전이었다. 약속을 잡아도 항상 같은 지인들이니 새로운 사람에게서 오는 자극이 전혀 없었다. 사람들과 부대끼는 일이 슬슬 그리워지기도 했다.

바깥에서 오는 자극이나 피로도가 없다 보니 밤에 잠이 안 오는 게 심해지는 것도 문제였다. 어쨌든 출근하면 회사에서 돌아다니기도 하고, 지하철에서 기 빨리면서 얻는 몸의 피로감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이 없으니 새벽까지 말똥 해졌다. 프리랜서 작곡가나 작가들이 대부분 밤낮이 바뀐 채로 생활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쉽게 깨져버리는 생활패턴과 불면으로 인한 건강악화, 이것이 프리랜서의 현실이다.

그래서 회사 다니는 게 더 낫다는 거야?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그래도 혼자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삶을 선택하겠다. 그저 혼자 일하는 게 로망만큼 즐거운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단점들이 부수적으로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지금은 이 모든 감정들이 적응기였다는걸 깨달았다. 졸업하자마자 5년동안 회사생활을 했고, 사람들과의 접촉이 많은 정신없이 빠른 템포의 일이었다. 그러다가 나 혼자 정적인 시간이 한없이 펼쳐지니 나도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던 거였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노트북을 켜는 일, 내 영역 안의 모든일이 컨트롤 가능하다는 것에서 오는 안정감, 고요한 매미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마감하는 일,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이 모두를 잊지않고 사랑하기로 했다. 어차피 모든 현상에는 나를 갉아먹는 불행들이 존재한다. 나는 나를 덜 불행하게 하는 쪽에 화살표를 눌렀다. 

2. 불안함을 견디는 일

의외로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건 <불안>이라는 감정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의 현실은 불안과 끊임없이 싸우는 일이다. '용기 내서 퇴사했으니 하고 싶은 일을 밀고 나가기만 하면 되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밤만 되면 불안이 불쑥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점점 줄어드는 돈에 대한 불안, 수입 안정성의 불안, 다른 부업을 병행할지에 대한 불안, 나중의 취업 불안, 내가 하는 일의 실패 가능성의 불안 등등.... 그렇게 불안의 바퀴가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돌아가다 보면 바깥에는 어스름한 푸른빛이 들었다. 불면, 밤을 새우는 날이 늘어났다.

밖에는 사람들이 오늘 하루도 바쁘게 출근하는 소리가 들렸다. 반면 나는 고요한 집에 홀로 앉아서 작업한다. 분명 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백수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열심히 하루를 채워도 실체가 없고 아무것도 안 하는 느낌이었다.


퇴사할 때는 회사 탓이라도 하지만, 내 도전에 실패하면 오롯이 나의 책임이라는 것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내 상황을 아는 주변 사람들이 "그래, 요즘 잘하고 있어?" 하는 질문도 눈에 불을 켜고 나의 실패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아 부담스러웠다. 내 안의 잔잔한 의식은 조그만 돌에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렇게 불안감에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힘든 시간들을 지나, 현재의 나는 나름대로 안정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다. 흔히 자기 개발서나 쇼츠에서 말하는 '불안을 없애는 방법'같은 것들은 아니다. 그들은 자기 확신을 가지라며 간단히 말하지만 다들 그걸 모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확신 없이 불안해봤자 부정적인 결과만 초래한다는 것도 알지만, 그게 쉽지 않으니 모두가 고민인 것 아닌가.


나는 불안을 없애기보단 견디는 쪽을 택했다. 불안도 어찌 보면 내 안의 소중한 감정의 일부, 함께 가기로 한 것뿐이다.

매일 불안이 나를 덮친다. 그러면 앉아 심호흡하며 나를 다시 다진다. 긍정적인 상황들만을 상상하며 암시한다. 명상하며 내가 할 것들을 각인시키고 현재에 집중한다. 밖으로 나가 운동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게 안될 때는 그냥 불안감을 파고들도록 내버려 둔 채 쉰다. 매일 무너지는 나를 스스로 일으켜 세우고 글을 썼다. 이게 반복되자 불안은 많이 줄어들고, 반대되는 감정들이 내 의식에 꽤 큰 부분을 차지하며 자리 잡았다.

반복된 행위는 점점 나를 강하게 했다. 깊은 바닷속 끝없이 가라앉기만 하던 나에서, 지금은 하얀 모래사장 위 파도를 철썩철썩 맞으며 앉아있는 내가 되었다. 파도가 이따금 나를 덮쳐온다. 가끔 거대하게도 나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단단한 모래 위의 나는 바다에 빠지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다.


3. 노는 것에 대한 자책감

한국사람들은 자기 개발서 때문인지 '노는 것'에 대한 자책감을 디폴트로 갖고 있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1분 1초를 허투루 보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감탄했고, 노는 건 낭비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유행하는 갓생 살기처럼 하루를 열심히 살아야지만 의미 있다는 이상한 강박. 하지만 대부분은 갓생 살기를 실패하는데 거기서 오는 자괴감은 오히려 발전을 저해하고 나를 갉아먹을 뿐이다.

혼자 일을 하면 노는 것에 대한 자책감을 가지기 쉬워진다. 프리랜서를 시작하고 나는 하루를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에 빠졌다. 일어나면 계획을 짜고 새벽까지 작업에만 몰두했다. 중간에 좀 쉬고 싶을 때가 와서 여행을 가거나, 드라마 정주행을 하고 있으면 이래도 되나 싶은 자책감이 몰려왔다. 결국 제대로 쉬지 못하고 스트레스만 쌓이는 날의 연속이 됐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나를 몰아붙이는 짓은 이제 그만해야 할 것 같았다. 노는 것은 낭비가 아니다. 마라톤 하는 사람도 중간에 물 마시는 시간이 있듯이, 에너지를 채우는 시간이 필요하다. 충분히 쉬고 다시 작업하니 오히려 능률이 올라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는 것에 대한 자책감으로부터 나를 내려놓으니 더 이상 스트레스받지 않고 불안하지 않았다. 일만 열심히 할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일'과 '노는 것' 둘 다 열심히 하는 것이다.

4. 결과는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

1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결과주의적인 사고가 팽배한 사람이었다.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 과정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고, 회의할 때도 과정이 긴 사람들을 보며 '그래서 결론이 뭔데?'라며 속으로 답답해했다.

평생을 지배해 온 이 사상은 자립해서 내 일을 시작할 때도 똑같이 적용돼 악영향을 끼쳤다. 내가 도전한 일에 실패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에 불안감은 더욱 커졌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힘을 자꾸만 응축시켰다.  

갑갑한 기분에 아무 버스나 올라타 정처 없이 떠났다. 화려한 거리들을 지나 창밖으로 서울역이 보였다. 자연스레 부산에서의 기억과 서울역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순간이 떠올랐다. 그동안의 일련의 과정들이 레고처럼 눈앞에 조립됐다. 문득 내가 결과보다 과정을 더 중요시한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없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사실 영화 현장 스텝이 되고 싶었으면서, 번듯한 4년제 대학 나와 번지르르한 사무직 회사를 가야 한다는 결괏값에 의해 첫 번째 회사를 선택했다. 서울에서도 잘 버틴다는 걸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더 유명한 회사로 이직했고, 결과적으로 연봉을 높게 준다는 사실에 세 번째 회사에 갔다. 그 속에 과정은 회피되고 생략돼 있었다. 내 진심은 꾹 눌려진 채 있다가 마침내 서른 살에 터져버린 거였고, 나는 이제 더 이상 결과가 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생각해 보면 일련의 과정 속에 얻는 것은 항상 있었다. 대학생 기자단 활동을 하면서 글 쓰는 것의 재미와 능력을 알았고, 패션기획 대외활동을 할 때도 내가 색깔과 미적인 것에 민감하다는 것을 느꼈다. 3번의 퇴사와 이직으로 지금의 내가 있고 프리랜서 도전을 하면서 영상 만드는 능력도 훨씬 늘었다.

결과라는 울타리는 저 넓은 초원에 맘껏 풀어두고서, 나는 앞으로 과정을 즐겨야 했다. 조건 없는 진정한 과정들이 쌓이면 나를 어떤 결과로 자연스레 데려다 주리라. 그때부터 나를 옥죄던 결과라는 것은 사라지고 불안감에서 해방되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불안하지 않다.

이전 11화 세 번째 퇴사, 방황의 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