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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세아 Sep 19. 2023

세 번째 퇴사, 방황의 끝

퇴사를 후회하지 않는 이유


제주도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을 무렵, 나를 새로운 회사로 스카웃한 PD님에게 연락이 왔다. 밤 11시에 무슨 일이지 싶어 카톡을 보니 온 메시지는 단 2개.

[ 세아님 오늘 회사 그만둔다고 보고 드리게 됐어요.]
[ 자세한 건 휴가 끝나고 복귀하면 이야기합시다 ]

카톡을 보고 처음에는 멍했다. 하지만 이내 몸속에 코르셋이 터진 것처럼 이상하게 나는 해방감이 들었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일을 그만둘 구실이 생긴 것이다. 서른 살, 방황의 끝이 도래하였음을 느꼈다.

첫 회사를 번아웃과 건강악화로 퇴사하고, 두 번째 회사는 사람관계와 내 안의 갈등이 극심해져 퇴사를 마음먹었다. 그 때마침 다른 회사에서 꽤나 높은 연봉 인상을 제시해 나는 3번째 입사를 하게 되었다.

입사를 앞둔 1월, 나는 다짐했다. 만약에 이 회사도 아니라면 정말로 이 업계를 떠나자. 내가 항상 의식 속에 잠식해 두던 하고 싶은 일을 하리라. 그런데 이 일이 제주도 둘째 날 밤에 일어나고 말았다. 계속해서 하고 싶은 일을 열망하는 내 마음이 현실로 이끌어준 것만 같았다.

연애던 일이던 나는 후회 없이 최선의 시점까지 해보는 타입이었다.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을 때까지. 그래서 저번 장기 연애는 전남친과 30번 넘게 싸우고 헤어졌지만 마음 다할 때까지 사귀었고, 마지막 순간에 미련 없이 뒤돌아 설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결말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그 시점까지 도달하기 위해 기꺼이 달리고 또 달렸다.

제주도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기분은 참 묘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창 밖 구름 가득한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곧 마주할 퇴사면담에서 늘어놓을 이야기를 머릿속에 준비하고 또 되뇌었다.




2달 뒤, 나는 3번째 퇴사를 한 서른 살이 되었다.
물론 서른 살에 다른 직업을 도전한다는 사실이 두려울 때도 있었다. 친구들은 안정된 직급에 현생활을 견고히 다질만한 시기인데, 나는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하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30살에 아직도 꿈을 좇는 게 철없어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당연시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더 넓은 영역으로 갈 수 있다. 까마득한 20살 대학생 시절로부터 10년이 흘렀고, 그로부터 40살까지 10년이 이제 시작되는 시점이다. 20대의 10년 동안 일어난 무수히 많은 일들이 다시 그만큼 리플레이되는 것이다. 20대는 다양한 경험들을 하고 방황하기도 하며 나의 색깔을 찾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제 그 경험들 중에 좁혀진 몇 가지들을 실행해 보고 꾸준함을 30대에 이어간다면, 40대에는 어떠한 결과물을 손에 쥘 수 있으리라.

폭염경보가 울리는 오후, 나는 자취방의 흰 테이블에 앉았다. 오른쪽에는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타놓고 귀여운 춘식이가 그려진 노트를 펼쳤다. 버킷리스트 같은 것을 썼다. 회사 다니는 동안 하지 못했던 것들, 그동안 머릿속에 하고 싶었던 일들을 사소한 것부터 커다란 것까지 쭉 써 내렸다. 써져 있는 글들을 보니 전체적인 맥락이 있었다.

'회사를 다니지 않는 것'
'내가 잘하는 것들을 살려 나 혼자만의 일을 하는 것'
'어떤 형태로 창작을 함에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
'내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일을 하는 것'

다음 날 바로 필요한 장비들을 사러 갔다. 심하게 방황하던 1회차 퇴사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때는 게으르고 실행력 없는 나에 대한 자괴감에 빠져 살았지만, 모든 것이 디자인이 된 지금은 실행력에 불이 붙었다. 이럴 수 있나 싶을 만큼 밤새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뭐든지 적당한 때와 시간이 있다. 그때는 그만큼의 방황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 시간이 있어 지금이 있다. 젊은 사람들이 배가 불러서 의지가 없는 게 아니라, 모호함과 디자인되지 않은 길이 청춘들을 방황케 한다.

세 번째 퇴사,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방황의 끝을 맞이했다. 주변 사람들은 서른 살에 3번 퇴사한 나를 보고 인생이 꼬였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반대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퇴사는 내게 그토록 원하던 삶을 선물해 주었다.


어차피 내 인생인데, 왜 하고 싶은 대로 살지 못하고 불행할까? 왜 어딘가 끌려가는 것만 같을까?라는 의문이 항상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은 거기서 해방되어 아침에 눈뜨고 잠드는 순간까지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을 채워나가고 있다. 드디어 인생이 내 손안에 쥐어지고, 그 주인은 내가 되었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죽음의 문턱 앞에 섰을 때 이제는 웃으며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좆대로 살아서 즐거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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