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올라와 첫 자취를 5평짜리 원룸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원룸에서 지지고 볶은 지 2년째, 나는 투룸으로 이사생각이 너무나도 간절해진 상태였다.
처음 집을 구할 때는 뭘 몰라서 부동산에서 보여주는 곳만 보다가 여기를 덜컥 계약했었다. 나중에 서울에서 좀 적응하고 보니, 부동산은 대체로 거지 같은 집들만 소개해준다는 걸 깨달았다. 컨디션 좋지 않은 집들을 보여주며 이것들도 금방 나간다는 식으로 압박을 주다가, 조금 괜찮은 집을 제시해 바로 계약하게 만드는 방식.
그래서 이번엔 어플 보며 내가 직접 뛰어다니니라, 다짐하며 서울에서 투룸 전세 구하기가 시작됐다.
내가 실행하고 있는 전세대출에는 조건이 많았다. 일단 해당 대출을 집주인이 가능하다고 허락해야 했고, 불법 건축물이나 복층은 불가했다. 처음 집 구할 때도 괜찮은 곳이 있어 계약했지만, 알고 보니 집주인이 옥상에다가 헬스장 같은 걸 지었던 이력이 있어서 대출 실행이 안 됐다. 이렇게 조건에 충족되지 못하는 집들을 다 빼고서 적당한 가격에 좋은 평수의 집을 구하기는 정말 빡센 것이었다.
출근해서 일하는데 다방에서 띠링하고 좋은 매물이 올라왔다. 새로 인테리어 한 건지 화이트톤으로 깔끔하고 무려 1억에 투룸이라니. 주말이 되자 얼른 그곳으로 달려갔다.
내부는 과연 사진과 똑같아서 흠잡을 때가 없었다. 하지만 외부가 문제였다. 외관이 너무 오래된 건물 같았고 주변이 귀신 나올 듯 스산했다. 창문이 거의 황동색에다 낡아서 움직여보니 창이 닫히질 않았다. 여기서 살다 간 벌레와 무서움에 떨며 살 것이 뻔했다.
그 매물을 보고 오니 다방어플의 집들이 어떤 식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가격이 저렴한 곳은 오래됐거나, 위치가 좋지 않거나, 근로시설 등 이유가 하나씩 있었다. 집이 멀쩡하고 가격도 좋은 곳은 정말 가끔 나타났는데, 보자마자 재빠르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그렇게 전화 걸면 부동산업자의 대답은 둘 중 하나였다.
"아 거기 방금 계약했어요."
"여기 보러 온다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집 보는 것도 번호표 받으셔야 돼요. 번호표 받아도 오전 중에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게 몇 번이나 반복됐고 나는 거의 탈진상태가 되어 의자에 널브러져 버렸다. 전세 구하기가 이렇게 빡세다니. 그것도 출근하면서 뛰어다니려니 배로 힘들었다. 서울에서 내 집, 도대체 어디 있니?
괜찮은 신식 오피스텔까지 아직 완공 전이라 안된다는 은행원의 연락을 받고, 나는 자포자기 심정이 되어 다시 원룸으로 기어들어가야 하나보다 생각했다. 체념해 버린 그 순간, 1억 초반의 투룸 전세가 매물에 땡 하고 떴다. 모든 희망은 왜 항상 절정의 끝에 열리는 걸까.
초등학교와 경찰서가 주변에 자리 잡은 그 동네는 환하고 밝은 분위기였다. 문을 열고 집을 보는 순간, '아 여기다!'라는 직감이 왔다. 적당한 크기의 투룸에 오래되지 않은 건물, 위치도 좋았다. 신혼부부 집이었는데 벽이 온통 짐으로 가려져 있어서 어수선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마음에 쏙 들어 바로 계약하겠다고 했다. 부동산 아저씨도 참 좋은 집이라며 기간이 한 달 남아있으니 도배도 해줄 것을 약속했다.
그렇게 이사 D-day. 마음에 쏙 드는 투룸에 평화롭게 사는 일만 남았나 싶었지만..... 이사 당일 그것은 보기 좋게 깨져버렸다.
안 그래도 그동안 집 관련된 이런저런 일들에 한껏 예민해져 있었던 나는 대폭발 해버린 것이다. 도착해 보니 집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집이 청소가 하나도 안 돼있고 더러움 그 자체였다. 그리고 짐이 다 빠진 것을 그날 처음 보는 거였는데, 벽지가 죄다 곰팡이에 너덜너덜한 곳도 있는 것 아닌가. 벽에는 뭔 짓을 했는지 구멍도 엄청나게 많았다. 이삿짐 아저씨는 집 상태를 둘러보더니,
"이건 좀 아닌 것 같네요.. 부동산에 집청소랑 도배 안되어 있다고 연락하고, 도배 새로 해달라고 요청하면 들어줄 겁니다. 사진도 꼭 촬영해 두세요 다."
그렇게 차분하게 조언해 주었다. 그리고 끝까지 다독여주며 짐을 완벽히 옮겨준 그는, 그날 유일한 어른이었다. 나는 열이 받을 대로 받아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얘기하니 그는 아니 아직도 도배가 안 돼있냐며, 분명히 청소랑 요청했고 한 달이나 시간이 있어서 돼있는 줄 알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잠시 후, 집주인아주머니가 방문했다. 나는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이것저것 어떻게 된 거냐 물어보았다. 하지만 집주인은 본인이 되려 당황한 반응이었다.
"청소는 원래 세입자가 알아서 청소하고 살면 되는 거지, 그리고 못자국 이런 거 우리는 신경도 안 쓰고. 도배는 지금 방수 공사 중이라 못하고 조금 있다 해줄게요."
집주인은 나중에 도배를 해줄 것을 약속한 뒤 떠났고, 나는 부동산에 전화 걸어 신경을 덜 쓴 부분에 대해 항의했다.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분이 안 풀렸지만, 청소는 양보해 내가 하기로 하고 1억을 집주인에게 송금했다. 화를 식히고 있는데 부동산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집주인이 10만원밖에 못 받았다고 연락이 왔다는 것 아닌가.
어이가 없어서 송금 캡처화면을 보냈더니 그제야 집주인이 잘못 봤다며 연락이 왔다. 눈에 보이는 뻔한 공격에 뭐지 싶었는데, 부동산 아저씨가 하는 말이 더 가관이었다.
"아까 아가씨가 보자마자 이것저것 따지기만 했다고.. 저렴하게 전세 줬는데 원하는 게 많아서 서운하다 하더라고요. 돈 못 받았다고 하는 것도 그래서 그런가 보요 허허..."
그렇다. 저렴한 전세니 청소도 안 해줘도 되고, 벽지가 뜾겨있어도 참아야지 어디서 집주인에게 물어보냐는 것이다. 만약 계약할 때부터 도배나 청소가 안된다고 들었으면 나도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 된다고 해놓고 이사 당일에 엉망이니 내 입장에서는 사기당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벽지나 못 박힌 곳은 임차인이 체크하고 사진 찍어둬야 나중에 집주인이 부당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는 건 흔하게 알려진 이야기라, 꼼꼼히 체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 후로 일주일정도 기다렸으나 예상대로 도배는 소식이 없었다. 부동산에 한 번 더 연락을 넣어뒀지만, 짐을 계속 안 풀고 있자니 살기가 불편해 그냥 포기했다. 헹거와 커튼으로 누런 벽을 다 가려버리니 그런대로 괜찮았다. 깨끗이 청소하고 꾸미니 투룸이 다시 나만의 집으로 살아났다.
나름 만족하고 다시 기분이 돌아온 어느 날, 갑자기 벨이 울렸다. 문을 열자마자 집주인 부부가 들이닥쳤다. 그리고 그들은 뭔가 작정한 듯 와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도배와 주차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일반적인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싸우자는 듯 아주머니가 몰아붙였다. 지금 나에게 공지를 해주는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나랑 한판 붙자는 건가? 이야기는 그런 내용이 아닌데 말투가 너무 공격적이고 건물이 떠나가라 큰소리로 얘기해서 나는 무슨 상황이지 싶었다.
"아니.. 도배는 안 해주셔도 돼요. 저기 보시면 짐 때문에 불편해서 헹거 다 설치해 놓았고요."
내 말에 집주인은 안쪽방을 흘긋 보더니 아~그러냐며 차분해져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집주인들이 돌아가고 혼자 적막하게 남겨진 나는, 어쩐지 한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은 분명 대화가 아닌 공격이었다. 전쟁 같던 그날 이후 집주인과 나는 전세 2년 동안 서로 아무런 연락 없이 지냈다.
진정한 어른이란 어떤 모습일까? 종종 내 머릿속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나도 이제 아랫 세대에게 진짜 어른이라고 불릴만한 성장을 과연 했을까 하는 고민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본보기로 삼을만한 어른이 주변에 존재할까. 꽤나 오랫동안 생각해 봤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사회에서 만났던 수많은 어른들, 직장 상사부터 해서 집 구할 때 마주했던 집주인들까지. 그들은 자신이 세월이라는 경험치로 얻는 것을 이용해 아랫 세대에게 도움을 주기보다는,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에 가까웠다. 내가 가지지 못한 세월이라는 무기로 얻어맞은 그날들은 꽤나 차갑고 치사하게 느껴지는 기억들이었다.
나의 회사생활 첫 사수가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의 선임이 너무 좋은 사람이었다며, 그 사람이 잘 가르쳐준 덕분에 지금까지도 일을 잘 버텨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렇기에 나에게도 똑같이 해줄 것이라고, 그때의 고마운 마음을 그대로 전달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정말로 사수기간 동안 온 힘을 다해 나를 케어해 주고 피드백해 주었다.
그녀가 떠나고 몇 년 뒤 나에게도 후임이 생겼다. 나는 자연스레 내 후임에게 똑같은 말을 했고 같은 행동을 했다. 고마웠던 감정은 시간이 흘러도 내 가슴벽 한편에 완벽히 붙어있었다.
모든 것은 답습된다. 사수가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쳤다며 자신도 후임을 몰아붙이는 사람도 있고, 자신은 일에 차갑게 던져졌다며 똑같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사람도 있다. 자연스레 자신이 겪었던 상황을 되물려준다. 내가 어떤 어른이 될 것인지는 나의 선택이다. 그저 나는 집주인 같은 차가운 얼음, 어른은 되고 싶지 않다. 중요한 건 모든 것은 쉽사리 답습된다는 사실이다.